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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Sep 27. 2024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니거든

라 라구나 - 트리아카스텔라 23.5km

비는 그쳤지만 쌀쌀하고 안개 자욱한 아침이었다. 어제 피곤했던 탓인지, 아니면 날씨가 궂어서인지 아무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콘레체 한잔을 마시기 위해 1층 Bar에 내려와 앉았다. 창밖으로 니콜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지나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이 걸어온 방향을 가리키며 몸짓과 표정으로 경사가 심하다는 말을 내게 하고 있었다. 난 금방 내린 따끈한 커피잔을 살짝 들어 보이며 여유 있게 미소 지어 보였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구나.



나 역시 ‘오 세브리오’까지 마지막 오르막길이 남아있었다. 오늘은 그곳을 지나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 ‘트리아카스텔라’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일기예보는 오전 중 맑아진다고 했다. 난 더워지기 전에 출발하기 위해 서둘렀다. 상당한 고지대였지만 안개로 인해 풍경을 볼 수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꿈속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의 산길을 한참 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때 어디선가 악기연주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걸어가니 성벽 같은 곳에 백파이프 연주자가 보였다.


여기부터 갈라시아 지방이 시작됨


순례길을 걷다 보면 길가에서 연주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은 순례자들의 호주머니에서 짤랑거리며 은근히 짐이 되는 동전을 노리고 있었다. 나도 움직일 때마다 소리 나는 동전을 몇 번 준 적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구걸하는 사람이라고 치부했는데, 힘들게 걷다가 만나는 그런 순간이 가끔은 쉼이 되어주는 것을 느꼈다. 잠시 음악을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지며 다시 걸을 힘이 났다.



‘오 세브리오’에 도착했지만, 여긴 더욱 짙은 안개로 마을의 모습을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지나는 길목에는 아주 오래된 전통 가옥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형태의 집 모양이라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문이 작고 낮았으며, 지붕은 필요 이상으로 컸다. 문을 두드리면 금방이라도 스머프가 튀어나올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난 신비한 느낌의 스머프 집을 뒤로한 채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어제 비가 많이 온 데다 안개가 껴있어서 내리막길은 꽤 미끄러웠다. 조심히 걷고 있는 나를 여지없이 빠르게 지나가며 ‘부엔 까미노’를 외치는 외국인들. 내가 천천히 걸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낯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시작을 같이 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최소 하루거리는 앞서 있었다. 익숙한 사람들과는 멀어졌지만,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설레고 즐거웠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내려올수록 안개는 걷히고 파란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들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곳까지 어디 하나 막힘없이 뻥 뚫린 장면이 눈에 들어오자 너도나도 서서 감탄을 자아냈다. 자연스럽게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어대기에 바빴다. 가끔은 멋진 광경에 짧은 탄성을 내뱉고는 이내 휴대전화 화면 속에 찍힌 경치에 빠져들어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편안하게 자기 집 거실에서 커다란 TV 화면으로 BBC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슬슬 배가 고파져 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마을을 지나고 있었는데, Bar가 보였다. 입구에는 ‘Homemade cheesecake’라고 크게 쓰여있었다. 배도 고팠고 치즈 케이크의 맛이 궁금했다. 난 안으로 들어가 앉기도 전에 ‘치즈 케이크’를 외쳤다. 잠시 후 내 앞에 놓인 치즈 케이크는 아래쪽이 연하고 은은한 노란색이었고 그 위에는 블루베리잼이 발라져 있었다. 주인장은 내게 케이크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자신이 기른 소에서 짜낸 우유로 만든 치즈와, 자기네 밀밭에서 수확된 밀가루로 만든 빵, 직접 키운 블루베리로 만든 잼을 발랐다고 했다. 그야말로 ‘Homemade’였다.



시간은 꽤 흘렀지만, 스페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중 하나가 그 치즈 케이크였다. 아직도 그 맛이 느껴지는 것 같다. 한국에서 먹어볼 수 없는 맛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맛있는 케이크를 먹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보이는 풍경이 갈수록 대관령과 닮아가고 있었다. 초원에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들과 언덕 끝에 걸려있는 뭉게구름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아래로 향해 길 위를 보면 온통 소들이 싸질러놓은 똥들로 가득했다.



갈리시아 지방은 목축업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에 그런지 가는 곳마다 소똥 냄새가 진동했다.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양이 길에 널브러져 있었다. 밟지 않고는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순례길을 경험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난 결심했다. 순례길이 끝나고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절대 이 신발을 한국으로 가지고 돌아가지 않겠다고.



‘트리아카스텔라’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아기자기하고 매우 매력적인 마을이었다. 평점이 좋은 식당도 몇 군데 있었고, 대체로 알베르게들의 평가도 괜찮은 편이었다. 내가 예약한 곳은 털북숭이 주인장이 나를 맞이했다. 얼굴과 온몸에 털이 그렇게 많은데 신기하리만치 딱 한 군데, 머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은 남자와 여자가 각각 다른 방을 사용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데, 상당수의 알베르게가 같은 방을 사용했다. 남자인 나는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여자들은 상당히 불편함을 느낄 만했다.



볼리비아에서 왔다는 ‘세르지오’가 나에게 한국인이냐며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자신이 재미있게 봤다는 K-드라마의 제목을 줄줄이 나열했다. 대부분 난 알지도 못하고, 들어본 적도 없는 제목들을 신이 난 듯 내게 자랑했다. 역시 남아메리카에서 한류가 강세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는 한국에 꼭 여행하고 싶다고 말하며, 가보고 싶은 곳을 얘기했다. 쉬지도 않고 한참 동안을 내게 이야기하는 세르지오에게 말했다. 난 너희 나라 ‘우유니 소금사막’에 가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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