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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Sep 30. 2024

나 한국 사람이야

트리아카스텔라 - 사리아 23.5km

사리아에 가려면 두 갈래의 길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다. 갈림길을 알리는 표지석 앞에서 네덜란드 아주머니를 또 만났다. 그녀는 어제도 갈림길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조금 거리는 길어지지만 언덕 위쪽에 있는 경치 좋은 길과 짧지만, 아래쪽에 있는 길이 갈라지는 구간이었다. 그 지점이 해발 1,200m쯤 되었다. 난 150m를 더 올라간다고 경치가 크게 달라져 보일 것 같지 않아 고민하며 내게 물어보는 그녀에게 짧은 길이었던 왼쪽을 가리켰다.



갈림길이 나오는지 몰랐던 난 휴대전화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수도원이 있는 남쪽 ‘사모스’ 방향으로 가거나 북쪽 ‘산실’ 방면으로 가야 했다. ‘사모스’는 ‘산실’로 가는 것보다 무려 7km나 더 길었다. 난 고민할 이유조차 느끼지 못한 채 ‘산실’ 방면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녀에게 ‘This is my road’라고 외쳤다. 하지만 거리가 짧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급경사의 높은 언덕을 하나 넘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인지 나무가 울창한 숲길 덕분에 비는 별로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길은 높은 나무로 인해 평소에도 해가 들지 않았는지 이끼가 매우 많아 미끄러웠다. 순례길 초중반에는 비를 거의 맞지 않아 좋았었는데, 요 며칠 계속 비가 오고 안개 낀 날씨였다.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짙은 안개 사이로 우뚝 솟은 커다란 나무뿐이었다.



잊을만하면 마을이 하나씩 나타났지만,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적과 안개 낀 골목, 외양간 그리고 그곳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가 나를 반겨줄 뿐이었다. 그렇게 마을 몇 군데를 지나고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 마을 귀퉁이에서 조그마한 자판기를 발견했다. 처마도 있어서 비를 피할 수도 있었고, 긴 의자도 놓여 있었다. 난 레몬 맛 이온 음료 하나와 초콜릿, 그리고 빵 하나를 선택했다. 다행히 동전이 충분했다.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노란빛이 감도는 하얀색 털의 그 개는 큰 머리를 내 가슴팍에 대고 킁킁대기 시작했다. 살짝 긴장됐지만, 녀석의 행동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저 내가 들고 있는 빵에만 관심이 있었다. 난 녀석이 귀여워 보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먹을 건 주지도 않고 자꾸 만지기만 하니, 실속이 없다고 느꼈는지 뒤돌아 다른 사람에게 갔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네덜란드 아주머니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 개에게 던져줬다. 그게 뭔지 내가 있던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녀석은 원하던 것이 아니었는지 그마저도 거부했다. 그 아주머니도 하얀 털을 여러 차례 쓰다듬어 주다가 갑자기 자기 손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나도 얼른 내 손을 코에 가져다 대보았다. 우웩. 난 하마터면 구역질할 뻔했다.



담벼락에 빗물이 고여있는 곳을 찾아 여러 번 손을 씻었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냄새가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 외국인이 향이 진한 핸드크림을 나에게 주었다. 다행히 냄새는 감춰졌다. 한바탕 소동을 하고 나서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계속된 짙은 안개로 바라볼 풍경이랄 게 없었다. 다행히 미끄러운 숲길은 지나고 한적한 시골 도로 옆을 계속 걸었다.



조금씩 집들이 많아지더니 큰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개는 걷혔지만 비는 계속 부슬부슬 내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순례자가 가장 많이 모이는 ‘사리아’에 도착했다. 이곳부터 걷기 시작해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순례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시간상의 이유로 전체를 완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페인 학생이 수학여행으로 이곳에서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순례길을 걷는 코스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도시에 머물렀던 경험으로, 순례길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지점 인근에 알베르게를 예약했다. 다음 날 아침에 순례길로 다시 합류하기도 원활하고 복잡한 시내를 얼마 거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알베르게는 소문처럼 깨끗했고 시설이 좋았다. 침대마다 커튼이 달려있어 사생활 보호에도 좋았고, 일단 흔들리지 않도록 천정까지 맞춰 제작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짐을 푸는데 영국인 가족이 들어왔다.



엄마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11살짜리 딸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봤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함박웃음을 짓더니 ‘블랙핑크의 나라’라고 외쳤다. 갑자기 신이 난 그 아이는 나도 모르는 한국 아이돌의 이름을 죄다 나열하고 있었다. 순례길을 걷기 위해 처음 파리에 도착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대부분의 외국인에게 좋은 이미지였다. 대체로 한국과 일본은 그랬다. 옆에 땅 큰 나라는 제외다.



Tip. ‘사리아’부터는 미리 알베르게를 예약하자. 순례자가 급격히 늘어 숙소 구하는데 어려움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 구간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해 계속 걸어야만 했다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또 한 가지는 예약한 알베르게에서 단체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다른 층에 침대를 달라고 요구하자. 잠을 잘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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