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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Oct 11. 2024

나는 아직 길 위에 있다

오 페드로소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19.3km

눈이 떠지자마자 짐을 챙겨 알베르게를 나섰다. 일찍 문을 연 Bar에 들러 순례길의 마지막 아침 식사를 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살아가면서 이렇게까지 부지런 떨며 아침을 시작하는 날이 얼마나 될까? 아마 없을 듯싶다. 창밖엔 일찍 출발하는 순례자들의 뒷모습이 안갯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파란 하늘에 맑은 날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매우 아쉬웠다. 짙은 안개에 조금은 쌀쌀한 기온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는 것을 위안 삼아야 했다.



마을을 벗어나 본격적인 순례길로 접어드는 삼거리를 지나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요술램프 ‘지니’와 알프스 소녀 ‘하이디’였다. 대뜸 나보고 산티아고 대성당의 12시 미사에 참석할 거냐고 물었다.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냥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천주교인은 아니었기에 미사에 참석하는 건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녀들은 오늘 그 유명한 향로 미사가 12시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나에게 귀띔해 주었다.



향로 미사라…. 궁금하긴 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프로그램에서 한두 번 본 적이 있었다. 까미노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반드시 나오는 정보이기도 했다. 시간을 보니 빠듯했다. 부지런히 걸어야 간당간당하게 도착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어젯밤 다른 여자 순례자 여러 명과 마지막 밤을 기념하며 술을 많이 마셨다고 했다. 미사는 참석하고 싶지만, 숙취로 인해 시간 안에 도착할 자신이 없어 일부 구간을 택시를 탈거라고 말했다.



한국인 순례자 요술램프 ‘지니’는 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일정 사이에 순례길을 경험하고자 ‘사리아’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고 했다. 오늘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내일 바로 모로코로 간다고 말했다. 그녀의 여행 중 일부였던 순례길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 길이 그녀의 기억에는 어떻게 남을까 궁금했다. 문득 5일 남짓 걷는 순례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꼰대가 되어가는 것일까? 서둘러 안갯속으로 향했다.



울창한 숲은 짙은 안개를 만나 신비롭기까지 했다. 마치 베일에 가려진 신부의 얼굴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나를 안달복달 나게 만드는 심보 고약함도 느껴졌다. 붉은 흙과 높게 뻗은 나무. 걷다 보니 광릉수목원과 오늘 가는 길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까지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오늘은 별로 많지 않았다. 다들 택시를 탔나? 더 일찍 출발했나? 늦게 출발했나? 심지어 학생들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 넘어 어딘가에서 천둥소리같이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들어보니 비행기 이착륙 소리 같았다. 공항이었다. 산티아고 공항.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외곽에 도착했다. 안개 자욱한 공항의 활주로 아래쪽을 빙 돌아 언덕을 하나 넘으니, 거짓말처럼 안개가 걷히고 산티아고 시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주위를 에워쌀 정도로 순례자가 많아졌다. 전부 어디에 숨어있다가 짠! 하고 나타난 것만 같았다.



내가 걸어온 ‘프랑스 길’은 수많은 산티아고 순례길 중 하나일 뿐이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하는 ‘프랑스 길’,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하는 ‘포르투갈 길’, 스페인의 북쪽 해안을 따라 걷는 '북쪽 길’, 스페인 세비야에서 시작하는 산티아고 순례길 중 가장 긴 ‘은의 길’ 등 그 외에도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길의 종류는 매우 많다. 그 모든 길에서 걸어온 순례자는 모두 이곳 산티아고에 모이게 되어있다. 갑자기 사람이 많아진 이유가 있었다.



잘 포장된 인도를 걸어서인가? 오늘이 마지막이라서 그런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발걸음이 매우 가벼웠다. 마지막 종착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가는 모든 순례자의 얼굴은 상기돼 보였다. 나도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이 속도라면 12시 미사에 충분히 참석할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두리번거리며 이 구경 저 구경하며 걸었겠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서 빨리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싶었다.



11시 40분.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섰다. 사진으로 수백 번도 더 본 그 장면이 내 앞에 펼쳐졌다. 내 다리로 800km를 걸어 이곳에 서 있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12시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입구를 찾았다. 한두 명에게 묻고 나서야 길게 줄이 선 입구를 찾았다. 5분 남짓 줄을 서 입구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나를 막아섰다. 배낭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여태 줄을 섰는데. ‘how?’



다행히 바로 옆에 있던 선물 가게에서 배낭을 보관하는 서비스를 했다. 보관료는 3유로. 배낭을 맡기고서야 난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본 대부분의 대성당이 그렇듯 무척이나 화려했다. 이미 수많은 사람으로 꽉 찬 성당의 가운데를 향해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겼다. 힘겹게 들어가 선 가운데 자리에 낯익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요술램프 ‘지니’와 알프스 소녀 ‘하이디’였다. 나를 보더니 와서 앉으라고 손짓했다.



천주교 미사인 데다가 스페인어로 진행이 되어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학창 시절 친구 따라 몇 번 가 본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신부님의 차분하고 일정한 톤의 목소리에서 편안함이 느껴졌다. 분명 이 자리에 모인 순례자를 축복하는 것이겠지. 꽤 길었던 미사가 끝나자 여러 명의 사제가 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섰다. 한 사람이 불을 붙인 향로를 높이 들고는 뒷걸음질 쳤다. 그 사제의 손에서 향로가 떠나며 향로 미사가 시작됐다.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듯, 사제들이 줄을 당길 때마다 향로는 더욱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성당 안이 향으로 가득 찼다. 그 향을 맡으며 향로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동안의 모든 피곤함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모두 그 모습을 휴대전화에 담느라 정신없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나는 순례길 완주 증명서를 발급받으러 갔다. 내 차례를 기다리다 보니 증명서를 받아 들고 우는 사람이 꽤 많았다. 산티아고 대성당을 마주했을 때도, 증명서를 받고 나서도 난 그저 담담했다.



돌아온 대성당 앞 광장엔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사람들,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성당 맞은편 건물의 돌기둥에 기대앉아 하염없이 대성당의 두 첨탑을 바라보며 나의 냉정함에 다시 한번 놀라고 있는데, 세계 여행 중인 한국인 부부가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두 사람은 나에게 자신들의 배낭을 맡기고 완주 증명서를 받으러 갔다. 난 휴대전화를 꺼내 이 묘한 감정을 적어 내려갔다.



첫날 피레네의 오리손 산장에서 현금이 부족했던 나의 손에 0.5유로를 건네주었던 한 프랑스 아주머니의 미소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십 년 전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했던 말이 현실이 되어 지금 여기 산티아고에 있는 나는 37일 동안 무엇을 배웠을까?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감정과 감각들. 길에서 만난 수많은 도움의 손길들.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가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현실의 삶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비로소 가슴속 깊이 꾹꾹 눌러놨던 순수한 나와 동행해 본 첫 여행이 감격스러웠다. 한참 동안 그렇게 난 울었다.



이번 여행으로 나의 삶이 갑자기 막 변하고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례길의 경험은 나에게 힘이 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의 삶을 이끌어 줄 것이라 확신했다. 인생의 절반쯤 살아왔지만, 처음으로 내가 성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냥 놔두시지 않고, 이 길을 걷는 내내 나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서, 같이 길을 걷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소홀했던 나의 내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셨다. 가슴 벅차고 행복하다.



이제 나의 까미노는 끝났지만, 나는 아직 인생길 위에 있다. 비록 한 걸음 한 걸음이 느려 보일지라도, 그 걸음들이 모여 내일의 나를 만들 것이다. 첫발을 내딛는 것,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함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안갯속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또한 앞으로 살아가며 만나게 될 고난과 역경을 막을 수도 없다. 하지만 수없이 외쳤던 ‘부엔 까미노’처럼 인생의 모든 순간을 관대함과 배려라는 선택을 통해 살아내길 원한다.


모두 ‘부엔 까미노’.


향로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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