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했으니 미련이 없다 말했지만 꿈을 포기하는 것은 꽤나 쓰린 일
2020년 8월, 4년간 도전했던 임용고시를 포기했다. 2년 간은 독서실과 노량진 학원을 오가며 미친 듯이 몰두했고 나머지 2년은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며 틈틈이 공부해 시험을 치렀다. 마지막 시험은 공부도 거의 하지 않고 반포기 상태로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교육학에서 이제까지 치렀던 시험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허탈했던 기억이 난다. 교육학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전공 점수는 택도 없었기에 불합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래, 나는 이 바닥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하루에 15시간씩 2년 동안 공부도 해보고, 300군데 원서를 넣어서 기간제 교사도 해봤다. 이제는 미련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임용고시를 포기할 수 있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아이가 있는 곳에, 필요로 하는 그때에,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 합격이 늦어지는 것이라고 나를 위로하기엔 이젠 내가 너무 지쳐버렸던 것이다.
2013년 고3 시절 원서를 쓰기 한참 전부터 나는 교사가 되기를 꿈꿨다. 그래서 소중한 수시 티켓 6장 모두 영어교육과를 지원하는 데 썼다(지금 생각해보면 미쳤었나? 싶다). 2014년 꿈에 그리던 영어교육과에 진학했고 순조로운 대학 4년을 보냈다. '나는 나중에 교사가 될 거니까, 임용고시를 볼 거고 당연히 합격할 테니까'라는 생각으로 그저 학점만 챙기며 아무런 고민 없이 대학 생활을 했다. 그저 즐거웠던 나날들이었다.
대학교 4학년, 나는 임용고시 공부를 시작했고, 열정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대학 수업과 수험 공부를 병행하면서도 학점 챙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매일 14시간 이상을 공부하며 지냈다. 하지만 '한 번에 보란 듯이 합격해야지, 그리고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이 생각은 오만에 그치고 말했다.
초수 합격에 실패한 후 나는 노량진으로 향했고 그곳에서도 합격을 꿈꾸며 열심히 수험 공부에 매달렸다. 삼시 세 끼를 혼자 먹으며 손에 요약노트를 놓지 않았을 때에도,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아 입을 떼는 게 어색해졌던 어느 순간에도, 매일 15시간씩 앉아 있어 순환이 되지 않아 저린 다리를 매일 주무르며 잠자리에 들어야 했을 때에도 나에겐 꿈이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지독했던 1년이 또 지나고 이 정도면 됐겠지, 이 정도 노력이면 합격할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 필기 합격여부를 확인한 날, 나는 또다시 불합격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마냥 달콤했던 내 인생이 쓰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건 이때부터였을까.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며칠간 틈만 나면 울었다. 두 해 시험에서 연달아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합격할 수 있었던 걸까라는 의문이 풀리지 않아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고 1년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험 준비에만 몰두했던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져 한스러웠다.
그리고 하필 또 그 해 나의 가장 친한 동기는 합격하는 바람에 나는 끝을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매일 밤 울다 자기 일쑤였고 벌겋게 부은 내 눈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증오했고 내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는 바로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없었다.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그 시험을 위해 또 기대에 부풀어 공부에만 매달릴 자신이 없었다. 이토록 잔인한 시험 절벽에 난 또 낙하산도 없이 나 스스로를 떠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절벽에서 떨어져 또다시 추락할 때 나를 구원해줄 낙하산을 매기 위해 기간제 교사 원서 접수를 시작했다. 1월, 2월 밤새 원서를 작성하고, 이메일을 보내고, 새빨갛게 손을 얼려가며 이 학교 저 학교 참 많이도 다녔다. 버스와 지하철을 수없이 오르고 내리고, 지도를 찾아보며 수십 개의 학교를 찾아다녔다. 그러는 와중에 울컥울컥 눈물이 나기 십상이었고 나 자신에 대한 연민도 참 많이 느꼈다. '내가 상상하던 2월의 내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나의 상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서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원서를 돌리고 집으로 와 또다시 원서를 작성하고 침대에 누우면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그리곤 옆에 언니가 자고 있어 큰 소리로 울지 못하고 매번 숨죽여 눈물만 뚝뚝 흘리며 하나님께 절실히 매달렸다. 나는 밤마다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도움을 간절히 바랐다.
막 대학을 졸업한 어린 나이와 시간 강사 경력도 없는 퓨어한 무경력의 환장의 콜라보. 이 조합으로는 서울에서 1년짜리 기간제 교사 자리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낮다고, 시간강사부터 차근히 준비해보는 것은 어떻냐는 주변 지인들의 말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원서를 썼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라는 오기 같은 게 생겼다. 꼭 내 한자리 찾고 말겠다는 일념 하에 직진 도로를 무한 질주했다.
이렇게 난 서울과 경기도 도합 약 330개의 원서를 썼고(서울에 중, 고등학교가 이렇게나 많은지 그때 알았다) 6개의 학교에서 면접을 보았으며 그중 한 학교에 최종 합격하여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서울에서 내 자리를 찾아내었다.
가끔은 수업시간에 끊임없이 지방방송을 켜는 아이들 때문에 위가 쓰라린 게 느껴질 만큼 화가 날 때도, 그런 화를 참지 못하고 덜컥 소리를 지를 때도, 난감한 상황을 맞딱으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새하얘질 때도 있었지만 재미난 1년이었다. 내 담당 업무였던 학교폭력 사건들 때문에 위염약을 달고 살아야 했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예뻐 보였고 교직 생활은 즐거웠다.
생애 첫 사회생활이었기 때문에 설렘보단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데 나에게 이렇게나 인복이 넘쳤었던가?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어서 얼타고 있던 나를 끊임없이 응원해주시고, 귀찮은 내색 없이 흔쾌히 도움을 주시는 선생님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강렬히 남을 나의 첫 사회생활이자 교직 생활의 첫 장이 같은 부서 선생님들 덕분에 아름답게 기록되었다.
내가 근무를 하고 있던 그해에 거제도 한 고등학교 초임 영양사 선생님이 과도한 업무로 세상을 등지신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출근하는 길에 기사를 보고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교무실에 도착했는데 같은 교무실 선생님께서도 그 기사를 보셨는지 나에게 "선생님, 첫 해라서 모든 게 낯설고 힘드시죠. 혹시라도 혼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있으면 언제든 저희에게 얘기해줘요. 꼭이요."라고 하셨다.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울컥 솟았는데 꿀꺽 삼켰다. 그 선생님은 잊고 계실 그날의 대화지만 지금 나에게는 소중한 기억 중에 하나이다.
내 옆자리 선생님은 베테랑 선생님이셨다. 모든 것을 척척 해내시는 슈퍼우먼! 내가 맡은 업무를 지난해에 도맡아 하셨던 선생님이라 정~말 질문을 많이 드렸다. 눈치 보다가 틈만 나면 "저, 선생님~.." 하며 묻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선뜻, 심지어 내 자리로 직접 오셔서 도움을 주셨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으셨을 수도 있고, 아이들 때문에 유난히 힘드셨던 날도 있었을 것이고, 업무가 바빠 나의 도움 요청이 귀찮았을 때도 있으셨을 테지만, 나에게 언제나 같은 얼굴이셨다. 언제나 밝은 얼굴. 그런 선생님을 보며 '나도 연차가 쌓여 후배 교사가 도움을 요청하면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지'라고 마음먹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역시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퇴근 후 순공 시간 5시간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퇴근하고 느끼는 피곤함은 나에게 조금은 쉬어도 된다는 정당성을 부여해주었고 나는 그러한 정당성에 수긍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간절한 마음에 그렇지 못한 태도랄까?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그해 시험 결과를 학교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2019년 종업식 날, 전체 교직원 회외를 마치고 올라와 조금 늦은 오전 11시쯤 결과를 확인하였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지만 간절히 합격하기를 바랐다. 제발 합격해서 이 학교에 있는 선생님들께 드디어 합격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이 학교를 떠나고 싶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을 안고 결과를 몰래 확인했는데 역시나 불합격이었다. 불합격 결과를 몰래 속으로 삼키며 전체 교직원 회식에 참석했고 꾸역꾸역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냥 멍했다. 난 이제 어떡하면 좋지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