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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심이 Jul 21. 2021

나는 임용고시 열차에서 하차했다.(3)

'NO'라는 대답, 어쩌면 내가 가장 기다렸던 말

제 글이 카카오톡과 daum에 소개가 되었나 봐요! 제 글 읽고 남겨주신 정성 어린 댓글들을 읽으며 그날 새벽 울고 웃고를 반복했네요. 임고, 공시에 대해 찾아보면 합격수기가 대부분이라 힘이 빠져 '아니, 왜 죄다 합격한 사람들 얘기밖에 없는 거야!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싶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합격 못하고 그만둔 사람도 있어요!!! 혹시나 저 같은 분이 계시다면 위안이 되면 좋겠어요!!'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제가 더 큰 위로를 받고 위안을 얻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저는 2020년 8월 임고 시장을 떠난 후 공시에도 잠깐 발을 담갔고... 지금은 다시 기간제교사를 하며 전공과는 무관한 길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방황이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힘이 되길 바라봅니다! 


혹시나 저처럼 방황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학교를 떠나며

1년을 몸담았던 학교에서의 생활을 차차 정리하기 시작했다. 뚜벅이로 출퇴근을 했기 때문에 이 수많은 짐을 어찌 옮길까 매일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한 선생님께서 택배로 부치면 된다는 꿀팁을 알려주셨다. 매일 조금씩 가져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꿀팁이 있었다니! 학교에서 큰 박스 하나를 구해 노트북 받침대, 등쿠션, 블루투스 키보드 같은 큰 짐들은 모조리 택배로 보냈고 귀여운 자석들이나 아이들 상품 간식, 쓸만한 필기용품들은 열심히 무료 나눔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필요했던 자잘한 물건들은 학교를 떠나는 날 양손 가득 챙겼다.


마지막 날 짐을 바리바리 들고 부서 선생님들과 인사를 한 후 노트북을 반납하러 내려갔다. 자꾸만 울컥하는 마음을 꽁꽁 숨기고 선생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렇게 학교를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지하철 역으로 가면서 '매일 바쁘게 오갔던 이 길을 이제는 더 이상 밟을 일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서운하면서도 왜인지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아 기쁘기도 한 오묘한 기분이었다. 



다시 그때, 그날로

2019년 1월, 난생처음 기간제 교사 지원을 시작했을 때에는 '무조건 1년짜리 자리를 찾고 말겠어!!'라는 마음으로 처음엔 1년짜리 계약이 아니면 지원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서류 탈락에 자신감을 잃었고 의욕이 떨어져 갔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써보기' 공법으로 전략을 바꿨다.


중, 고등학교 시간강사, 영전강, 1학기 계약, 1년 계약..'영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어떤 자리든 모조리 썼다('영어'라는 교과는 참 장단점이 뚜렷하다. 수요가 많아서 지원할 수 있는 곳이 많다는 건 장점이지만 그만큼 공급도 많아서 뽑히기가 힘들다는 게 단점이다. 그걸 아주 뼈저리게 느꼈다. 세상은 넓고... 영어교원자격증은 가진 이들은 너무나 많다!!). 매일 아침 서울시교육청 구인구직, 경기도 교육청 구인구직 탭을 드나들며 '영어'를 모집하는 곳은 홀린 듯 모조리 엑셀에 정리했고, 숨쉬기, 원서 쓰기, 밥 먹기 , 메일 보내기, 제출하러 학교 방문하기를 반복하며 두 달을 보냈다. 


서울에 있는 학교란 학교는 다 써본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새로운 동네에 가더라도 이름만은 익숙한 학교들이 참 많다. 짝사랑했던 상대를 만난 것 같은 아련한 느낌?..


임용을 그만두고 공시를 위해 한국사 시험을 다시 봐야 했는데, 그때 시험장이 내가 직접 원서를 제출하러 방문했던 학교였다. 어쩐지 시험장을 확인했을 때부터 뭔가 익숙하다 싶더니 역시 그 학교가 맞았다. 시험장 도착해서 속으로 혼자 얼마나 웃었는지. 나 진짜 부지런히도 다녔구나 싶었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세 번째 임용 불합격과 첫 번째 학교에서의 계약 만료를 견뎌내고 있던 2019년 말,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들 던졌다.


 '내가 이 공부를 계속해도 되는 것일까, 나에게 합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그리고 그 대답은 여전히 'YES'였다.  


이에 따라 나는 새로이 계획을 세웠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으니 올해는 1학기만 근무하고 2학기에는 공부에 올인하자는 계획. 


경력이라고 하기엔 부끄럽지만.. 그래도 당당히 경력 칸을 차지한 나의 학교에서의 첫 1년 + 인력풀 등재 + 1년이 아닌 한 학기. 이 전 해와 비교하면 어벤저스 군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해에는 한 달만에 자리를 찾아낼 수 있었고 드디어 마음을 내려놓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2020년 1학기,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코로나로 인해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많았지만 좋은 선생님, 예쁜 아이들 덕분에 참 많이 즐거웠다. 마지막 날은 역시 눈물파티로 마무리했다. 나는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은지! 나도 좀 쿨해져보고 싶다!



한창 날씨가 좋았던 때, 따릉이를 타고서 퇴근했었다. 근데 출발하고 10분만 들뜨고 좋았고 나머지 40분은 중간에 내리지 못해 억지로 타고가는 수준이었다..ㅎㅎ




'NO'라는 대답, 어쩌면 내가 가장 기다렸던 말

새로운 학교에서의 한 학기를 마무리하고 또다시 본격적으로 수험생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점차 나태해지는 나를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안의 열정이 식어가는 것을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 이걸 외면하려고 했고 억지로 꾹꾹 참아가며 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 스스로도 내 안의 이러한 모습을 외면한 까닭은 지난 수년간의 나의 노력과 기대가 아까워서가 아니었을까. 매년 떨리는 마음으로 합격을 기대했던 나 자신이 애틋하고 안타까워서가 아니었을까.


난 더 이상 임용 공부에 아무런 열정을 느끼지 못하는 내 모습을 외면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또다시 매일 반복해서 묻기 시작했다. 


'내가 이 공부를 계속해도 되는 것일까? 나에게 합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그 대답은 'NO'였다. 


'No'라는 대답. 어쩌면 내가 가장 기다렸을 말. 나는 내 자신이 'No'라고 말해주기까지 참고 또 참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 내 안의 이러한 목소리를 외면하고 억지로 책을 넘겼다. 초수, 재수 때처럼 다시금 열정을 태우기 위해 나 자신을 계속해서 채찍질했고, 그러면서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울고 있는 내가 불쌍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이 채찍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로 결정했고, 결단했다. 


나는 막연하게 내가 임용을 포기하는 그 순간은 대단한 순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어느 평범한 날, 어느 평범한 순간이었다.


그대로 책을 덮고 짐을 챙겼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임용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시원하고 섭섭한 기분.


나 스스로 실패자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듯했다. 어쨌든 나는 내가 바라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한 것이니까.


하지만 지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교사라는 꿈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매번 다시 꿋꿋하게 일어나 부지런히 내 삶을 꾸려온 나 자신이 나는 기특했다. 그리고 애틋했다.



내가 선택한 길, 그러니 연민은 느끼지 말 것

수험생 시절 인터넷에서 한 글을 읽었다. 글쓴이의 오빠가 기나긴 수험 생활 끝에 시험에 합격하셨고, 그 비결을 물으니 '나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단다. 이 글을 읽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수험 기간 내내 나를 괴롭혔던 건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던 것 같다(이건 임고를 그만두고 잠깐 공시 준비를 했을 때 더더 심하게 느꼈었다). 노력해도 합격하지 못하는 내가, 매일 아침 직장이 아닌 독서실로, 스터디카페로 출근 도장을 찍는 내가, 트레이닝복이 일상복이 되어버린 내가 불쌍했다. 그리고 가끔은 이런 울적한 기분에서 굳이 헤어나오고 싶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가라앉고 또 가라앉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교사가 되기위해 임고 시장에 뛰어든 건 나였다. 수차례 불합격을 마주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던 것도 나였고, 하루종일 묵언 수행을 하면서도 '꿈'하나 때문에 눈빛만은 반짝였던 것도 나였다. 매일 아침 독서실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울적해 했던 것도 나였고, 순공 14시간을 찍은 날이면 날아갈듯 뿌듯한 기분에 발걸음 가볍게 집으로 향했던 것도 나였다. 공휴일에 쉬지 못해 있는 짜증 다 부리며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던 것도 나였고, '내 인생에 더이상 공휴일에 독서실은 없다'며 이를 갈며 공부하던 것도 나였다. 


모두 내가 한 선택들. 모두 내가 꿈을 위해 만든 선택들. 그렇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민을 느껴야 할 대상은 그렇게 하루하루 목표를 위해 노력하던 내가 아니라 그런 나에게 연민을 느끼며 울적해하던 또다른 나였다.


꿈을 위해 달려나가며 반짝이던 시절. 그땐 왜 그걸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왜 불쌍하다고 연민을 느꼈는지. 다시 없을 열정을 태우며 직진하던 그때의 그런 내 모습이 가끔은 그립다. 


교직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다른 길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그 시절 열정의 불티가 작게나마 내 마음 한 구석에서 타오르고 있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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