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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Jun 02. 2024

생각의 부엌에서 일어나는 일

생각의 탄생을 읽고

지금은 '엄마집'이 된 유년시절 내 집은 방 3개의 32평 아파트였다. 당시에는 도시로 유학 온 사촌 오빠와 언니까지 우리 집에 살았다. 나는 4남매 중 막내였고 안방을 제외한 두 개의 방은 언니들과 사촌들이 차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럿이 방을 쓰는 게 여간 궁색한 일이 아닌데도 내 방조차 없던 나에게 방이 있는 사람들은 부르주아로 보였다.


나는 공상을 즐겨하는 어린이였다. 눈을 감고 큰 창에 환한 빛이 들어오는 저택을 하나 지어 올린다. 파티션을 이리저리 움직여 가며 여러 개의 방을 나눈다. 핀란드산(으로 추정되는) 묵직한 우드 테이블과 북유럽 디자인의 체어가 놓인 다이닝 공간을 만든다. 크림색 벽에는 루브르 박물관에나 있을 법 한 대형 그림이 걸려있고 식탁에는 테이블 매트가 여러 개 깔려있다. 그 옆으로 두어 개뿐인 낮은 계단을 올라가면 이탈리아산(으로 추정되는) 푹신한 소파세트가 놓인 최고급 응접실이 마련된다. 식사 후 편안하게 담소를 나눌 수 있고, 손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식사로 이어지는 동선을 고려한 배치다. 응접실 옆 파티션을 지나면 세련되고 널찍한 침대가 놓인 침실이 펼쳐진다. 유니크한 디자인의 책상과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의자가 놓인 공부방은 적절한 조도의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원할 때면 그 공간에 침잠해 낮이고 밤이고 공간을 즐겼다. 때때로 그 시절 열광한 에이치오티 멤버를 초대했다. 드라마에서 본 대로 멤버 중 두 명이 나를 동시에 좋아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도 연출했다. 한 멤버는 대놓고 잘해주는 따뜻하고 다정한 캐릭터, 다른 한 멤버는 차가워 보이지만 보이지 않게 배려하는 츤데레 캐릭터로 설계했다. 자발적으로 나는 그런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여주인공이 되었다.(상상 속 나는 전지적 작가시점과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넘나들었다.)


터무니없는 공간과 상황이 실재한다는 가정하에 두 남자를 잰 나의 행복한 고민은 끝날 줄 몰랐고, 로맨스가 시시해지면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한 시나리오를 촘촘하게 상상했다. 십 대의 공상으로 나는 잠들기 전이 하루 중 어떤 시간보다 바빴고, 피로는 꿈에게 상상의 바통을 이어줬다. 거대한 저택에서 충분히 사랑받은 여주인공이 되어 맞는 새로운 아침을 맞았다. 상상 속 부엌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마음껏 조리할 수 있었다.


정신적 요리는 마음의 부엌에서 시작된다. 거기서 개념들은 절여지고 졸여지고 살짝 튀겨지기도 하며, 때로는 다져지고 구워지고 휘저어져 모양을 갖추게 된다. 마치 요리의 대가들이 어떤 재료는 조금만 뿌리고 어떤 재료는 듬뿍 넣는 등 변화무쌍한 동작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처럼 창조적인 상상의 부엌에서도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대단한 아이디어들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솟아오르고, 생각지도 못한 재료들과 섞이기도 한다. 요리법 자체만 들여다보아서는 완성된 요리가 어떨지 상상할 수 없다. 정신적 요리의 대가들은 요리가 어떤 맛일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으로 재료를 혼합한 것만 가지고도 어떤 맛이 나올지 직감으로 안다. <루트번스타인, 생각의 탄생>





고등학교 시절, 가족 모두가 잠들었는지 철저히 확인하고 방문을 닫은 뒤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켰다. 비밀스러운 뭔가를 하려는 사람처럼 자그마한 부끄러움에 찡긋 웃었다. 귀 뒤로 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다음 가방에서 외국어영역 문제집을 펼치고 방송을 시작한다.

"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말 어려운 TO부정사의 쓰임에 대해 이야기해 볼게요. 매번 틀리는 문제들 위주로 읽다 보면 어느새 영어에 자신감이 넘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겠죠? 너무 피곤한 시간이지만 지금 깨어있는 당신이 승자입니다. 기지개를 켜고, 65페이지 첫 번째 문제부터 시작합니다. 먼저 지문을 함께 읽어볼까요?..."

EBS교육방송에서 노련하게 외국어영역 문제를 풀아주시던 선생님을 재연했다. 말투는 적당히 친절해야 하고. 사투리는 쓰면 안 된다. 세련된 아나운서처럼 말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세운 <EBS강사로 빙의해 공부하기>의 원칙이었다. 방송 도중 실체 없는 시청자에게 쉬는 시간을 주기도 하고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넉살 좋게 "잠깐, 이 부분은 제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볼게요, 여러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는 멘트를 핑계로 해설서를 훔쳐봤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나는 카메라 없이도 방송에 열심을 다 했다. 다음 날 응시한 영어 시험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어른이 되고 보니, 유치한 선생님 놀이는 나에게 약이 됐음을 알겠다.


실제로 과학자나 화가, 음악가들은 그들이 실제로 보지 못한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아직 세상에 나온 적이 없는 노래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한 번도 만진 적 없는 어떤 것들의 질감을 느낄 수 있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미셸 루트번스타인, 생각의 탄생>


주말 오후, 9살 딸과 함께 커다란 도화지를 펼치고 연필을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수북이 먼지 쌓인 상상 속 저택과 가구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상상 속 디테일을 정확히 옮기는 일은 불가능했지만 <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다가 아이에게 이것만은 꼭 가르치고 싶은 다급한 이끌림이 들었다.

아이는 내가 먼저 그린 저택 그림에 즐겁게 가구를 꾸몄는데 나는 아이가 더한 가구는 어디서 샀고 얼마인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상세하게 물었다. 방금 그린 러그는 2백만 원짜리 루이뷔통이라고 했다. (엄마가 억지를 조금 보탰다.) 나는 ‘LV’ 로고를 그려 넣자고 했고, 우리는 진짜 루이뷔통 러그를 갖게 됐다며 깔깔 웃었다. 바닥은 부드럽고 푹신한 양털 카펫을 깔았고 화장실은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 변기로 채워졌다. 응접실에는 대형 TV가 그려졌고 스크린 속에는 등을 돌린 두 남녀의 모습이 채워졌다. 지금 어떤 장면인지 설명하는 아이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내 언어와 상상의 한계가 바로 내가 아이에게 물려줄 세계의 한계다. 누군가 나에게 백지수표를 주면서 ‘당신이 물려주고 싶은 가장 고귀한 것을 적어 보시오.‘ 한다면 ’ 실재한 적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적을 것이다. 내가 물려준 세계에서 아이는 나처럼 놀고 꿈꾼다.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볼 수 있겠다는 격려는 내가 물려준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그 세계에 없는 가능성은 영영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세상에 없는 것을 마음으로 그리는 일을, 일어나지 않은 일과 실재하지 않은 것들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생각의 탄생법'을 물려주고 싶다.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이 반드시 '돈'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구체적으로 상상할수록 현실에 옮길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뇌과학에서 이미 증명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아이에게 물려주는 백지수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원하는 바를 머리에 명료하게 새기고 진정으로 소망하면 그것을 성취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중략) RAS(뇌망상활성계)는 열 추적 미사일과도 비슷하다. 열 추적 미사일을 보낼 지점의 좌표를 입력하고 발사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미사일이 알아서 목표지점까지 정확히 날아간다.  <앨런 피즈&바바라 피즈,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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