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시간 38분의 의미
엄마, 내가 학교에서 수학 문제 풀고 있으면
친구들이 나한테 다가와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본격적으로 수학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 됐는데, 이제 겨우 한 학기 선행을 하는 모습에 한 친구가 아직도 초등학교 문제집을 푸냐며 거들먹거렸다고 한다. 아들이 다니는 사립초등학교에서는 중학교 과정이나 고등학교 과정까지 선행학습한 친구들이 많다고 들었다. 나는 선행보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성실하게 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일러주면서, 지난 기말고사에 100점 맞은 아들에게 잘하고 있다며 용기를 북돋아 줬다. 아들은 선행 많이 하는 친구들 중에서 100점을 못 맞은 친구도 있다며 내 말에 수긍했다.
아들과 나눈 인상 깊은 대화를 기록하고 싶어졌다. 간단한 텍스트를 넣어 동영상을 만들고 인스타그램 릴스에 게시했다. 삼일절 날 목에 태극기를 걸고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찍어둔 영상이 아들의 씩씩함을 더해줄 것 같아 배경영상으로 넣었고, 요즘 유행하는 노래인 비비의 <밤양갱> 후렴구를 배경음악으로 삽입했다.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라는 가사가 어쩐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영상 속 텍스트는 이러했다.
“엄마, 내가 학교에서 숙제로 6학년 2학기 수학 문제 풀고 있으면 친구들이 나한테 다가와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너 이제 겨우 그거 하냐? 난 중학교 거 곧 끝나는데!'
“그래서 넌 뭐라고 했어?”
'그래, 나 수학 못한다, 그래도 나 5학년 기말고사 수학 100점 맞았거든, 우리 엄마가 선행한다고 다 잘하는 거 아니랬어.'
영상을 올리고 릴스 설명란에 우리가 나눴던 대화와 내 생각을 이렇게 덧붙였다.
“근데 엄마, 나 진짜 수학 못하는 거야. 우리 반 애들 중에 중학교 거 끝내 애들도 있어.”
“와.. 너 그거 크게 잘못 생각하는 거다.”
“왜?”
“너 예전에 기안 84가 나 혼자 산다에서 마라톤 하는 거 봤지?”
“응, 봤지.”
“그 마라톤에서 초반에 빨리 달린다고 좋아 보이던?”
“아… 아니.”
“너는 고등학교까지 수학 마라톤에서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해. 중학교 거 끝내도 반의 반도 아니야. 지금 빠르면 뭐 해? 마라톤 1등은 끝까지 가는 사람이야. 나는 기안 84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해냈을 때 반했어, 진짜 멋있었어.”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표정으로 끄덕이며
“아, 엄마 알겠어 나 늦겠다. 학교 다녀올게!”
새 학기를 맞아 부쩍 성숙해진 아들과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축구 못해서 친구들이 안 껴주니 속상하다고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인싸가 되고 싶은 아들, 친구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뭐든 다 잘할 필요는 없어. 근데 아들, 엄마가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넌 인싸야. 특히 우리 가족 모두에게, 알겠지?
#넌이미최고#힘내아들#아들스타그램
요즘 영상 만들기에 재미를 붙인 나는, 생각보다 마음에 들게 만들어진 영상을 흡족해하며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주말 아침의 여유를 흠뻑 느끼기 위해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내렸다. 늦잠 잔 아들과 딸이 부스스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와 식탁에 앉았다. 우리는 라디오를 듣고, 독서도 하고, 담소를 나누며 평화로운 아침시간을 보냈다.
한참 뒤 인스타그램 알림 메시지를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열었다가 평소와 다른 릴스 반응에 흠칫 놀랐다. 가까운 지인들이 평소보다 훈훈한 응원 댓글을 많이 남겨줬는데, 그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릴스 조회수였다. 평소 릴스 한 개당 평균 조회수는 200-300회로, 아무리 많아도 1000회가 넘지 않았다. 그런데 아침에 올린 릴스는 조회수가 수 천 회를 기록하더니 금세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만 회, 3만 회가 됐다. 조회수가 늘어날수록 모르는 사람들의 댓글과 좋아요도 늘어났다.
요즘 말로, 이 릴스는 '떡상'했다.
하루 서너 번쯤 인스타그램을 보는 내게 이 글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어느새 부담으로 다가왔다. 빈번한 좋아요 알림을 외면하기엔 너무 많았고(인플루언서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일일이 답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댓글이 달렸다. 처음에는 건전하고 바람직한 댓글이었다.
우연히 릴스보다 감동받아 댓글 남깁니다. 저는 초3 인싸도 되고 싶고 공부도 잘하고픈 딸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고민스러웠는데 지혜를 얻어 갑니다.
멋진 아들과 따뜻한 대화 좋아요.
오, 어머님 최고네요!
점입가경이랄까, 댓글 수가 20개를 넘고, 조회수가 10만이 넘어가면서부터는 40대인 내가 운영하는 인스타그램과 어울리지 않는(연령에 따라 어울리는 댓글이 정해져 있겠냐만은.) 거북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누가 댓글을 썼는지 계정을 눌러보니 대체로 비공개인 데다가 초등학생으로 추정됐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수학 푼다고 좋을 거 없어요.
니나 잘하세요.
선행 좋을 거 많은데.
(스케이트 영상 보며) 운동하면 선행해야 하는 거 아님?
...#@$@#%^*? (언급하기 불편한 욕)
웬만하면 댓글에 대댓글을 달아주려고 했지만, 짧고 의미 없는 댓글에 피로감을 느꼈고, 자기들끼리 댓글을 주고받는 논란의 장이 되면서부터는 내 댓글이 도마 위에 오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우려가 마음속에 번졌다. 선행 논쟁이 댓글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알림을 무시할 수 없고, 불편함도 계속 느끼고 싶지 않아 여기서 벌어지는 선행 논쟁의 판을 거둬야겠다고 결심했다. 영상을 삭제할까 생각도 했지만 나름대로 정성 들여 만든 영상이니 댓글 기능만 해제하기로 했다. (댓글 기능을 해제할 수 있다니, 참 다행이다.)
댓글 기능은 해제가 됐지만 여전히 좋아요 알림은 계속 됐고, 조회수는 20만 회를 넘어섰다. 인스타그램 비즈니스 계정에 제공하는 '인사이트 보기' 기능을 통해 게시물에 대한 TMI를 확인하고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릴스를 무려 21만 회나 시청했고, 그 시간을 모으면 400시간에 육박하며, 116회 공유됐고, 100명의 계정에 저장이 됐다.
'인스타그램 오래 하고 볼 일이군.'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살다 보니 십 대들의 공분(?)을 사 릴스가 떡상하는 일이 생기다니. 애초에 나는 '선행이 나쁘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던 게 아니었다. 단지 선행이 자기보다 늦은 친구를 은근히 깔보는 아이와, 거기에 대처하는 아들의 마음가짐에 인사이트를 녹여 영상을 만든 것이었다. 잠시라도 내 릴스 댓글창이 십 대들의 분쟁의 장이 되었던 것에 대해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공유하기를 통해 영상을 주고받은 아이들끼리는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콘텐츠가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 12초 동안 아이들을 영상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붙잡은 힘은 무엇이었을까?
끝으로, 모두의 시청시간을 합한 '398시간 38분'을 빤히 바라보며 한동안 그 숫자에서 시선이 거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