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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Dec 01. 2024

12월 1일 아침의 다짐

아들에 대해 지금의 내가 생각한 것들


13세 아들은 지고지순하다. 순종적이고 순순하다.


아직 스스로 공부하는 힘이 약하다. 숙제는 잘한다. 잘하려고 노력한다.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러므로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 수업에 집중하고 선생님께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야 한다. 선생님을 향한 존경과 신뢰가 학습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길 바란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이들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 공부에 눈을 뜬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스승, 격려하고 칭찬하는 스승. 나는 좀 욕심 내어 둘 다가 되고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집에서 공부하게 만들기는 어렵다. 부모가 자식을 공부하게 할 수 있을까. 믿고 격려하는 일 외에는, 가르칠 수도 숙제 낼 수 도 없는 게 부모라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만 간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일찌감치 아들을 가르치기를 멈췄다. 녀석이 배우는 것은 내 지식을 뛰어넘고 있다. ‘부모는 자식을 못 가르쳐’라는 말의 힘에 지배당했다. 4학년 때부터 수학 학원을 보내기 시작하면서였다. 그전까지는 내가 앉혀놓고 문제를 풀리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어렵겠다는 신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렸다. 지금이구나. 그때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자식과 사이가 좋은 엄마가 될 것인가.


그때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아들은 아직도 나를 스스럼없이 대하고 나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듯 보인)다. 내가 아들을 설득할 때 내 의도를 들어주고 이해한다. 때때로 한 두 마디 농담으로 내게 반항하지만 잠깐일 뿐이다. 스마트폰을 초등학교 6학년이 되도록 사주지 않았어도 한 번도 불평한 적 없었다. 그걸 사주고 우리 사이가 나빠질 거라는 사실은 우리 둘 다 공감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5학년이 되고 2차 성징을 보일 때, 나는 아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지시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저도 잘하고 싶을 것이다’라는 주문을 매일같이 걸었다. 말로만 신뢰하면 안 된다. 실제로 신뢰해야 내 입에서 진심이 나온다.


 공부가 집중이 되지 않는데 엄마는 자꾸 하라고 하면 본인도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 마음을 나도 누구보다 잘 안다. 집은 편안한 곳, 쉬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집에서 자꾸 공부하라고 하면 아무래도 내키지 않을 것이다. 당장 눈앞에 급한 불이 떨어져도 집은 쉬고 싶은 곳이다. 두 개의 가치가 상충할 때 자꾸 밀어붙이기만 하면 해소되지 않은 마음속 응어리가 스트레스로 쌓일 것이다. 시간은 걸리고 과정이 더디더라도 그때그때 불편함을 해소해 주고 물리적 환경과 정서적 환경을 학습환경으로 바꿔주려 노력한다. 당최 학습에 진전이 없을 때,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 스트레스를 받는 건 내 쪽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면 그때의 결정이 후회되지 않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진도가 조금 늦었던 게 우리 관계보다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자식을 다(끝까지?) 키워보지 않아서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꾸 이게 맞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속 깊은 자아가 묻는다. ‘뭐시 중헌데?’라고. 지금 너랑 나랑 서로 스트레스 받고 미운 말 쓰고 싸운다면, 대체 뭘 위해 우리가 이러는 거니? 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다 잘 살자고, 행복하자고 하는 일이다. 과정이 삐걱거리고 갈등이 일어날지언정, 가족이 서로 예쁜 말, 고운 말을 쓰고 사랑으로 보듬어줄 때 행복이 생겨나는 것 아닐까. 당장은 화가 나고 답답한 마음에 독한 말을 내뱉고 채근하는 일도 있겠지만, 그런 괴물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내 마음을 누르고, 부드럽고 중립적인 어조로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는 거다. 어디서? 지금 우리의 갈등이 시작된 바로 그 지점에서.


*글쓰기는 다짐이다. 오늘의 자그마한 다짐을 수시로 읽어보면서 마음을 닦아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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