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뷰 Jul 19. 2021

나와 너의 지(芝)

About. 《20년 후에, 지(芝)에게》,  최승자

최승자《20년 후에, 지(芝)에게》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작은 다리로 풀밭을 뛰어다니며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일투성이인 아이에게 세상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호기심이 가득한 어린아이는 보이는 모든 것에 애정을 담아 아이의 눈길만 닿으면 생명력 없는 ‘유리창마저 숨을 쉬고’, 도화지에 ‘그린 물고기는 하늘처럼 파란 물속에서 뛰놀’게 된다. 순수한 눈으로 대상을 대하고 관심과 애정을 쏟아부으면 세상 모든 곳에 생명의 에너지가 넘치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 ‘새로운 눈(眼)을 달고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곳은 더이상 유리창 너머로 보던 꿈의 낙원이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슬아슬’한 것이다. 한 팔로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위태로움, 기를 쓰고 죽을힘을 다해 견뎌야 하는 곳이 세상인 것이다.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사는 것이 삶이지만 외로움과 고독은 모두 저마다의 것이고, 한때 내가 사랑하거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 채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게 될 것이다. 지난날은 되돌릴 수 없고,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도 나의 삶은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누구도 대신 나의 물길을 터줄 수 없다. 인간이란 본래 고독하고 외로운, 삶의 출발과 끝을 혼자서 해야 하는 숙명적 존재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개체로서의 인간은 ‘나를 향해 몰려오는 세월의 개떼들’에게 ‘물려 죽지 않기 위해’ 버둥대지만, 피하는 방법은 스스로 ‘깊이깊이 추락’하는 자멸의 길 밖에는 없다. 죽음에 직면한 자의 입장은 죽음을 목격한 자와 같을 수 없다. 목격하는 자의 입장에서 그 어떤 거창한 명분과 미명의 구실을 가져다 대도 죽음에 직면한 자의 입장에서는 죽음은 완전한 소멸이며 종말로서의 부재일 뿐이다. 이것은 생명을 가진 존재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대원칙이며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허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 후에, ()에게》가 수록된 시집 『즐거운 일기』가 발표된 1980년대는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강하던 시기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열망은 대규모 학생 시위로 표출되었으나 군부의 계엄령 선포는 그들의 기대를 짓밟고 말았다. 이후 계엄군의 무력 진압으로 수천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자와 죽은  모두에게 지울  없는 상처를 남긴 광주 민주화 운동과 함께 시작된 1980년대라는 시기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좌절로 바뀌는 부정적 상황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 셈이다. 사회 경제적으로는 강남 일대의 개발과 부동산 투기 열풍 또한 극심하던 시기였다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물질만능주의를 심화시켰으며 소수의 선택받은  외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대다수의 동시대인들이 소외를 경험하게 됐을 것이다.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느끼는 절망적 고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길을 찾아 헤맬’ 모든 너인 것이다. 시대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로서의 존재에 대한 불안과 삶에 대한 절망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과 ‘깊이깊이 추락’하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부정적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체념적 목소리를 내게 된다.

 화자인 ‘나’가 여성 청자로 짐작되는 ‘지(芝)’에게 보여주는 것은 나를 향해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달려오는 폭력적인 세계이다. 화자가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싶은 그것은 화자를 여성으로 간주할 경우 여성 청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남성 중심의 봉건적 사고 방식의 세계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부조리한 세상 전체가 가해의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개’의 존재를 폭로하면서 화자가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죽음이다. 결국 불행한 시대가 불행한 정신을 만든 것이다.

 죽음에 도달한다는 것은 모든 것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고 그 관계 속에서 잊혀져 무의미한 존재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로서의 인생은 허무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최승자의 시 세계를 허무주의라고 단정짓는다.


 그런데 단지 모든 것의 끝이고 사라지는 것으로서의 죽음만을 노래한다면 그 작품이 오래도록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절망과 허무, 소멸과 무의미함 한가운데에서 다시 새로운 시작의 불씨가 될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에 있다. 시인은 ‘20년 후 지(芝)에게’를 집필하던 당시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절망과 허무를 인정한다.

 그러나, 20년 후의 어느 날, 너는 ‘잠시 울고 서 있을’ 뿐이며, 상처 있는 선량한 사람들을 위해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은 나이면서, 또한 너일 것이며 우리 모두이다. 이들은 보잘 것 없는 것 하나도 서로 나누며 연민과 배려의 마음으로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이 있는 한, 어두운 미래에도 한 줄기 희망이 있다는 것을 어린 청자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이쯤에서 끝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날을 위한 시작의 가치를 얻는다. 절망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한 발 앞으로 내디디는 최승자의 시 정신이 40년이 지난 현재의 독자가 읽어도 진부하지 않은, 한 편의 편지를 읽는 기분이 들게 한다.

 시인은 불합리하고 폭력적이며 억압적인 당대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시간이 가도 사회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며, 20년 후에도 ‘아슬아슬’하게도 살아가는 것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일이며,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는 것처럼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그래서 20년 후의 ‘지(芝)’도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패기 있게 걸어갔다가 절망하고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여겨지는 흐린 날, 거센 비마저 내리는 황량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세상이 살만한 것은 서로를 보듬는 연대의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세상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지만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틀에서 본다면, 사회의 바퀴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고 조금씩 발전한다. 부당하지만 당연시 여겨졌던 것들이 그 추악한 실체를 드러내고, 작은 목소리들이 큰 울림을 주며 결국 큰 함성으로 자라나게 된다.

 20년 후의 ‘지(芝)’에게서 ‘82년생 김지영’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작가의 이전글 진실은 승리한다. 2+2=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