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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 네트워크 Sep 26. 2021

어느 날의 변태

제2화

   1

  변태를 마친 매미가 제 껍질 위에서 몸을 뒤로 확 젖힌다. 외각이 상승한다. 허공이 주름을 활짝 편다. 접혔던 보자기처럼 날개가 허공에 가지런히 널린다. 날개 밑으로 낭떠러지가 가파르게 일어선다. 고요가 주위를 감싼다. 날개를 말리는 첩첩산중의 시간. 흰 날개의 골을 따라 연두색 피가 돈다. 섬세한 잎맥들이 점차 검은빛을 띤다. 우윳빛이었던 몸 전체가 이윽고 검은빛으로 칠갑된다. 우화가 완성된다. 방충망을 열어두자 바람을 좇아 매미 몇 마리가 시간차를 두고 차례로 날아나간다. 어느 나무에선지 새로운 매미 울음이 섞인다. 비온 뒤 갠 하늘이 차츰 높아진다. 


  매미들은 다 안다. 비가 밤새 땅을 부드럽게 적셔준 뒤 해가 나는 날이 언제인지. 매미들의 달력에 다 적혀 있어서 굼벵이는 사람 손가락만한 구멍을 뚫고 그런 날 밤에 벌벌벌 기어 나온다. 껍데기에 둘러싸인 눈이 어둠을 분별하기 어렵다는 걸 경험으로 다 알고 있어서 어미매미는 제 새끼가 기어 올라가기에 좋을 나무껍질 속에 꽁지를 박고 알을 낳아 왔다. 날개가 찢길라 가시나무는 안 되고, 날개가 접칠라 잎사귀가 너무 많거나, 밤눈 밝은 천적에게 채일라 발끝을 찔러 넣기에 너무 단단한 목피여서는 안 된다. 알들은 애벌레가 되어 근처 땅으로 내려가 몇 숨 푹 자고 깨어난 것이다. 매미들은 다 안다. 무방비 상태로 머무는 그 몇 시간과 땅속 몇 년의 긴장감의 질량이 같다는 것을.      


  새벽 산책에서 집어왔던 몇 마리의 굼벵이 껍질이 커튼의 상단에 듬성듬성 달려 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은 굼벵이 껍질일까, 매미 껍질일까. 굼벵이와 매미를 가르는 것은 껍질이지만,  굼벵이의 껍질이라기엔 너무 매미적(的)이고, 매미의 껍질이라기엔 아직도 굼벵이적(的)이다. 등이 찢긴 매미. 배의 주름과 날카로운 갈퀴가 있는 세 쌍의 다리, 한 쌍의 더듬이, 그리고 투명하고 둥그스레한 눈. 매미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방금 화석이 된 매미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갈색 화석. 잡아떼려고 하자 껍데기는 조금 저항을 한다. 날줄씨줄로 교직된 커튼의 올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나무에 단단히 박아 넣기에 좋았을 앞다리 갈퀴는 그러나 싱겁다는 듯이 곧 힘을 빼고 몸을 순순히 내준다. 


  화석은 연약하다. 시간의 콘크리트는 아직 부어지지 조차 않았다. 화석으로 명명한다고 화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듯,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과신하지 말라는 듯 껍질은 억새 잎 서걱대는 소리를 낸다. 사마귀처럼 강인한 갈퀴를 검지 끝에 대본다. 본능이 살아난 듯 갈퀴는 즉시 살갗을 파고든다. 지문의 돌기 하나가 실밥처럼 뜯어진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것과 죽은 것이기도 하고 산 것이기도 한 것 사이는 저 껍질의 정체성처럼 멀어서 멀미가 난다. 그건 생각보다 지루한 경주일지도 모른다. 철학은 늘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가리느라 고민해왔다.      

  갈라진 등을 조심스레 벌리고 들어가 본다. 거친 멍석이 깔린 시장의 난전인가 하면 전선이며 빨랫줄이 끊어져 나뒹구는 폐가인 것도 같고, 복도가 이러 저리로 뻗은 빈 저택의 로비인가 하면 여섯 방향으로 출발하는 철로가 깔린 이제는 폐쇄된 플랫폼인 것도 같다. 황량하고 적막하다. 아이언맨의 로봇슈트처럼 갈색슈트를 입고 매미는 전 자연을 대상으로 한바탕 전쟁을 치룬 것일까. 매미가 빠져나간 내부는 포화가 걷힌 전장처럼 침묵이 절반이다. 


  갈라진 등을 빠져나오다가 본다. 등과 배의 경계에 꽃씨 봉지처럼 얌전히 접혀진 채 매미 날개의 결까지 새겨진 날개집을. 몸집에 비해 가냘프기 그지없게 이 작은 곳에 들어있던 날개는 매미의 전 생을 슈트 밖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기다려온 물기 어린 파란만장이다. 껍질의 최초는 날개의 재질로 시작되어졌을 것이다. 갈라진 등을 빠져나오다가 본다. 이 파란만장을 넘기지 못한 채 커튼 위를 기고 있는 매미를. 보라색의 물똥인지 눈물인지를 여기저기 묻혀대고 있는 날개 접쳐 불구가 된 매미 한 마리를.      


  2

  이성복 시인이 자신의 시론집에서 이렇게 말했다지. 성도착性倒錯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번식이라는 ‘목적’을 위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異性이라는 ‘대상’을 위반하는 거라고. 그러니 시의 언어가 의사 전달이라는 고유 목적을 저버리고 내용 대신 표현, 의미 대신 음악을 추구하는 것 또한 심각한 도착 현상이 아니겠냐고. 성性을 떼어버린 후 도착倒錯이라는 용어의 위반적 속성을 다시 위반함으로써 얻어낸 아름다운 비유이다. 같은 논리로 성도착의 유의어인 변태성욕이나 유사 현상인 관음증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자연에 개입하는 것이 변태가 아니겠냐고 저 변태는 시인의 논리를 빌어 변태를 시적으로 설명하려고 꿈꾼다. 동식물의 탄생과 사망, 번식과 생존본능에 대한 관음증은 사실 인간이란 종의 숙명이 된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연의 합목적성의 왜곡과 굴절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경이와 외경심을 위해 동원된 대상 자체의 공포와 수치심이다. 현상적으로 말하자면, 나무나 풀잎의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고 위엄 있게 우화하지 못하고 형광등이 밝혀진 커튼 따위에 붙어 그 짓을 하는 경우, 이때 변태는 저 이성복의 ‘시적 도착’이 되기는커녕 변태를 세 번째 위반하면서 패악이 된다. 일개 매미인 나의 말이 좀 거칠어진 것을 용서하라. 누구든 내 경우가 되면 평면적이고 직설적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저 변태가 등껍질을 가르는 나의 고투를 나눠진답시고 등에 손톱가위를 들이댄 순간 나의 파란만장은 끝이 났다. 미성숙과 과잉성숙의 어느 지점이 인간의 자리인지 천천히 숙고할 시간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저 변태는 한 쪽 날개가 오그라 붙은 채 비척대며 등껍질을 벗어나는 나를 새파랗게 질려 들여다보았지만, 이내 이미 스무 배 이상의 크기로 펼쳐진 다른 매미들의 날개 쪽으로 황홀하게 눈길을 돌렸다. 


  동료들이 다 날아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나와 눈을 마주친 저 변태를 어찌할꼬. 나를 젓갈 냄새 아련한 플라스틱 통에 담아내 벚나무 줄기에 갖다 붙여놓고 미안하다고 주억거리는 저 변태의 사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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