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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Jul 13. 2022

소주 20병의 공기

그날도 여느 때처럼 비가 오는 날이다.

무슨 이유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을 마실 이유는 오억 구천만 개정도있으니 무슨 이유인지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 술을 먹던 시절이었다.


비가 오는 막창집의 앞마당에 앉아 천막에서 똑똑, 두두득, 후르르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술이 절로 들어갔다.

이 날이, 그 이후로도 한참을 20대의 우리들 사이에서 내내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소주 20병의 위업을 달성한 날이다. 음주가무를 지긋지긋하게도 즐기던 우리들이었지만 한 자리에서 소주20병이라니... 이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내 위장을 따라 알코올이 내 혈관을 휩쓸고 온 몸으로 퍼져가는 것같은 알싸한 신물이 올라오는 기분이다.


20여 년이 훌쩍 지난 기억으로는 셋이서 시작했던 것은 같은 준과 나, 그리고 그 나머지 1인이 과연 누구였는지, 그날의 영광스런 기억이 이상하게도 가물가물거렸다.

그날의 추억을 함께 공유한 준의 글을 읽은 오늘에서야, 그 나머지 1인이 탁이었다는 사실에 무릎을 탁!치며 문득 그날로 다시 휙~하고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아, 그렇네. 그 시절에 우리들이 엄청 몰려 다녔었더랬지. 



남사친과 여사친의 관계에 관해서 지금도 살짝 동경을 하는 나는 준과 탁은 참으로 이상적인 남사친, 여사친의 사이로 보였. 그런 둘이 은근히 부러워서 나도 자연스레 그 둘처럼 편안한 사람친구가 되고 싶어서 더욱  사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마도 소주 20병의 위업을 달성한  후였을 것이다.  날의 자세한 내막은 나는 사실 세밀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셋이 소주 20병에 - 아니, 거의 준과 나, 둘이 다 먹었음- 나는 당연히 취했고 예상치 못한 뻘 짓도 했을 것이다. 우리 학교 근처서 가게를 하던 작은 언니와 옥이언니가 출동해서 나를 택시에 태워 집에 보냈는데, 내가 다시 유턴을 해서 어디론가 뛰쳐 가려는 것을 반대 방향에서 택시를 잡던 언니들에게 딱 걸려서 쌍욕을 들으며 고이 집으로 향했다. 그게 그날의 기억의 끝이었다.

온전히 기억에 남은 것은 그날의 공기, 천막사이의 철 골조물 옆으로 빗겨내리던 빗방울과 출렁이는 비웅덩이였다. 그 빗방울 사이로 전해오는 그날의 공기는 누구라도 마음이 촉촉해지기에 충분했다.


그러고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어느날, 내게는 너무 이상적인 남사친 여사친같았던 20병의 전우들이 그 당시 우리 학교 앞에서 가장 분위기가 좋은 카페였던 루브르로 나를 불러냈다. 술잔을 주구장창 기울이던 우리들이 어울리지않게 루브르라니.

그때부터 먼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감지를 하긴 했지만, 그 심상찮은 일이 내게는 참 이상적인 이성사람친구의 표본이었던 준과 탁.

그 둘이서 연애를 하기로 했다선언일 줄은 짐작도 못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둘이서 사귀어 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농담이냐며 웃어버릴 뻔했다.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무슨 한달 간의 계약연애라나 머라나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데  유치함은 딱, 탁이었고 쑥쓰러움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표정의 준은 차마 내눈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탁에게 해온 게 있는데...

청춘남녀연애시작을 알리며 뭐가 차마 눈을 못 마주칠 인가 싶겠지만, 그들은 그랬다.

서로 말도 되는 헌팅스킬이나 작업 실패담을 공유하며 심각한 토론의 장을 펼치기가 일쑤였고, 아마도 화장실에 화장지가 없으면 서로 가져다 달라고 심부름도 시킬 수 있는 사이였다. 

아무리 끼워 맞추어 볼래도 상상이 안 가는 그들의 연애 소식에 처음에는 놀라움이 강타했고 두번째는 배신감이 몰아 닥쳤다. 상상이 안가는 어색한 둘의 표정에서 갑자기 친한 친구 둘을 동시에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전에도 이런 일은 더러 있었다. 재치있는 입담과 자연스레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분위기메이커인 준은 어딜가나 인기가 있었고, 거기다가 자기 스타일에 맞게 자기를 꾸미는 센스까지 겸비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외모로 한눈에 반짝이며 남자들에게 인기있는 준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녀를 연애100단 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그녀의 연애능력치를 존중하고 인정해주었다. 그래선지 조금 친해졌다 싶은 남자사람이 등장하면 어느샌가 준과 썸을 타거나 사귀었다.


그런 그녀가 왜 하필 탁이었을까. 물론 그녀석도 우리와 동성친구마냥 너무 스스럼없이 지내와서 그렇지, 대한민국의 준수한 남자사람이었다. 키도 적당히 운동은 딱히  하는 것 같은데, 체형 자체가 어깨가 넓은 요즘 말로 피지컬이 좋은 친구였다. 각진 얼굴이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런 상남자 스타일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많을 것이다. 다가 우리 지역 최고의 학군인 수성구에서 나름 관리받으며 자라온 티가 나는 단정한 가정의 훌륭한 자재였다. 그러한 탁이니 우리들에게나 무시를 받았지, 후배들이나 학교 밖에서는 꽤나 인기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리고 다니는 자존감도 강한 친구였다.


다만, 한가지 도무지 어찌할수가 없는 치명적인 결함은... 말투나 표정이 살짝 오버스러운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딱 중2병 말기의 사춘기 청소년의 멋부림이 온 몸에서 품어져 나와서 그것을 우리는 절대 견디어내지 못 했을 뿐이다.

(아, 그때는 '중2병' 이라는 이런 기가 맥힌 단어가 없었을까. 무지하게 놀려 주었을 텐데...)


물론 20대 초중반의 우리들도 모두 멀쩡하지는 않았고 사실은 우리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함께 사춘기 시절을 건너는 중이다는 것은 지금에서야 인정한다.

중2병 말기 증상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어깨를 삐닥하게 두고 눈쌀을 찌뿌리며 제멋에 빠진 20대의 탁이나, 과하게 흥이 넘쳐 술을 마셔대면 상상 초월의 싸이코 짓을 해대던 나나, 나와 함께 술주정뱅이의 길을 걸으며 우리 학교 일대를 굴러다니던 준 또한, 절대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나머지 아직 감춰놓은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절의 우리들은 10대 때에는 학업에 찌들리고 제대로 반항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마음에도 없는 모범생의 삶을 흉내내 살아가느라, 제대로 된 사춘기시절의 병치레를 당당히 치르지 못 다. 그러다가 성인이 된 20대에 비로소 감정의 자유인이 되었, 그제서야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우리들의 반항이 폭발하여 비로소 미친 20대의 사춘기가 찾아왔다. 우리들은 모두다 그렇게 어른 청소년 시절을 살았다.


그렇게 수시로 볼 썽 사나운 사춘기짓에 손발이 오그라들게 하는 탁이지만, 우리들이 놀리고 그렇게 구박을 해도 무던하게 한 패거리의 멤버로 자리매김할 때마다,  녀석은 우리와 오래도록 함께 갈 수 있을 진짜 남자사람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탁과 준의 연애라니...

그래서 왜 하필 탁이냐. 안타까웠다.

이건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지가 않았지만 일단은 잘 사귀어보라고 진심같지 않은 응원을 해 보았다.

그러면서 헤어져도 어색한 사이가 되지 않고 둘  이렇게 계속 친구로 남아있기를 조금은 말이 되지 않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생각보다 이 두 찐친들의 연애는 꽤나 깊고 진지했다. 둘이 코드가 잘 맞으니 연애도  죽이 잘 들어 맞았다.

차라리 이럴 바에 둘이 평생 연애만 하는 쪽으로 응원을 하는 것이, 두 친구를 잃지 않는 길인가 잠시 고민을 할 정도였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한 쪽이 일방적으로 감정의 깊이가 기울어져서 조화롭지는 못 했다.

깊고 무거운 감정의 탁은 늘 위태위태해 보였다.  또, 감정이란 것은 언제나 일방적일 수가 없기에 준 역시, 연인이 된 친구가 안타깝고 친구였던 연인이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연애 100단 준은 슬기롭게 잘 헤쳐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크기는 다르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받았 둘의 감정을 우리는 어느 누구도 시원하게 보다듬어 줄 수가 없었다. 우리들에게 연애를 선언할 때도 그 철이 없는 막내 동생같은 탁은 자기의 연애에 우리들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했다.  혼자 상처 받을 게 뻔해 보여서 조언을 해주고 싶다가도 기분이 언짢아지게 하는 참, 말 그대로 중2병 말기같은 녀석이었다. 그렇게 한때는 친구였는데 어느새 우리들은 완전 남이 되었다. 남보다 어색한 친구의 구남친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연애가 덜 깊었거나 혹은 그들이 계속 친구였었다면 지금 우리들은 어땠을까?

아직도 그때처럼 사람친구로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물어 뜯고 있었을까?

하긴 그 시절에 숱하던 사람친구 하나를 지켜내지 못 했으니 런저런 시간 속에 어른이 되어가느라 어차피 소식이 끊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소식이 궁금한 대학동창의 자리는 차지했겠지.


이제는 이렇게 다들 어른이 되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중증 사춘기병을 겪어낸 나도, 준도 어른 사람의 흉내를 잘 내면서 살아가듯이

탁도 진짜 어른으로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앨범속에서 너네들의 꼭 같은 삐딱한 어깨의 사진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둘이 연애를 하면서 소외받을 나를 챙긴답시고 꼭 티가 나도록 불편하게 나를 끼워서 우방랜드를 갔던 날의 사진이었다. 둘의 어깨가 꼭 같이 삐딱했다.

내 어깨만 겸손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 의도치 않게 이름때문에 행여나 남남연애로 오해하실 불상사가 발생할까봐 덧붙임. 준은 여자사람이고, 탁은 남자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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