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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Mar 13. 2023

아름이네

"야, 너 어릴 적에 너네 옆집 살던 아름이 기억나나?"

기억하지. 이아름. 대략 40여 년 전에 우리 옆집에 살던 뽀글머리의 귀여운 꼬마, 아름이.

"애를 낳고 두 놈이랑 복작대다보니, 한번씩 나는 걔가 생각이 나더라. "


엄마의 장례식에서 두 아들의 아빠가 되어 몇 해만에 만난 내 사촌동생이 갑자기 아름이의 얘기를 꺼냈다. - 말만 동생이지, 나에게 한번도 누나라고 부른 적이 없는 녀석이다. 분명히 나보다 1년, 정확히 10개월을 늦게 태어났는데, 빠른 생이라는 이유로 같은 해에 학교에 들어가더니 항상 내 이름을 부르는 건방진 녀석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이모가 애기인 내가 너무 예뻐서 이모도 딸을 하나 낳아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서 니 녀석을 잉태한 탄생의 비밀에도 나에게 전혀 감사를 모르는 놈이다. -


"니가 아름이를 어찌 ?아름이는 우리 옆집에 살던 애인데..."

깜짝 놀랐지만 이내, 그 시절에 우리들은 그랬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살던 이모네랑 우리는 엄마들에게 무언가 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의 집으로 향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름이. 기억이 나지. 똑똑히 기억하지. 나도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가끔씩 그 아이를 생각했다. 더 정확하게는 아름이, 아름이의 엄마와 아름이네 집이 선명하게 기억한다. 40여 년이 지난 이웃집 아이를 떠올리는 사촌 동생의 기억 속에 아름이도 정확히는 아름이네 집에 사는 아름이의 엄마를 가진 아름이였을 것이다. 나는 분명 알 수 있다. 네 녀석도 아빠가 되었으니.



내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부터 살던 동네는 집 앞에는 대구를 가로 지르는 천이 있었 (※정식 명칭은 금호강이었으나 우리는 다들 신천이라고 불렀다.) 반대쪽으로는 작은 아파트와 미로같은 골목길을 헤쳐나가면서 주택가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그 너머에는 대구에서 유일한 여자 대학교도 있었고, 나중에 로라장이 된 극장도 있었다. 극장을 가로질러서는 현재도 규모가 꽤나 큰 시장도 있었다. 또, 중동교라 불리는 집 앞의 다리를 건너면 바로 수성구와 이어지는 에법 큰 동네였다.

하지만 희안하게도 그렇게 빼곡하게 이어진 미로같은 집들 사이에서 우리집과 아름이네 집만 유독 천의 뚝방길 윗쪽으로 대문이 있었다. 다른 집들은 다 뚝방길 안쪽으로 펼쳐진 골목길 안쪽에 있었는데 우리집과 아름이네 집만 동네의 반대쪽인 뚝방의 윗쪽으로 입구가 있었다. 그래서 안쪽 동네와 담벼락은 붙어도 우리 두 집만 외따로 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아름이네는 뒤쪽으로 쪽문이 있어서 동네랑 이어지기는 했지만 정문인 큰 대문은 우리집처럼 외딴 쪽에 있었다. 이렇게 덩그라니 두 집만 외따로 있으니 두 집은 서로 왕래를 하며 지냈다.


우리가 살던 집에는, 뚝방바로 아래 대문쪽으로 살짝 얹혀진 좁고 어두운 문간방에 우리 가족 6명이 살았다. 이외에도 안채에는 아름이와 동갑인 은희네가 안채의 반을 차지하고 살았고 그 나머지 안채의 반을 또 우리 부모님보다 더 연배가 많은 한 가족이 살았고, 그 사이에 있는 쪽방에는 새댁이까지, 한 대문 안에 총 네 가구가 모여 살았다.

그러나 아름이네 집은 할머니, 아빠, 엄마, 아름이, 아름이의 개구진 남동생과 한번도 본 적은 없없지만 가끔씩 집에 오는 아름이 삼촌까지 오로지 아름이네 식구만 살았다. 아, 아름이네 집에는 뒤쪽에 쪽방이 있었는데 거기에 세를  가족이 있다 없다했다.

뚝방길 위쪽의 외 딴 두 집은 이웃사촌으로 살았다. 게다가 아름이 아빠와 우리 아빠는 본적이 같고 돌림자가 같아서 알고보면 먼 친척뻘이라며 반가워했다. 그러나 두 집의 아빠들은 연배도 다르고 각자의 삶이 바빠서 다른 교류는 없었고 다만, 나보다 두 살이 어린 아름이와 나는 동네 친구가 되어서 수시로 붙어 놀았다.

 


우리는 주로, 아니 항상 아름이네 집에서 놀았다. 둑방 아래의 우리집은 큰 방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고, 언니 둘이 지내던 작은 방은 창도 하나 없어서 마치 반지하방처럼 어둡고 좁았다. 그러나 아름이네는 이상하게도 언제나 밝고 따뜻했다. 심심할때면 나는 우리집의 회색빛 삭막한 콘크리트 마당을 가로질러 검붉은 녹이 군데군데 쓸어있는 대문을 열고 아름이네 집으로 갔다.

산뜻한 하늘색의 아름이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의 한 가운데에는 화단이 있었다. 빨간 벽돌을 둘러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알록달록한 예쁜 꽃들과 푸릇푸릇한 작은 나무들을 예쁘게 가꾸어져서 보기만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 해인가는 학교 앞에서 아름이랑 사온 병아리가 자라서 닭이 되어갈 때, 아름이네 아빠는 화단의 한 쪽에 둥근 철사로 울타리를 치고 그물망을 쳐서 닭장을 만들어 주셨다. 병아리는 아름이네 화단에서 어른 닭이 될 때까지 자랐다. 우리집으로 내가 데려온 병아리는 어찌되었는지 기억도 나지를 않는다.


아름이네 집의 구조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절의 평범한 구조의 반양옥집으로 화장실과 부엌이 집 밖에 있는 옛날집이었다. 그 시절의 로망인 빨간 벽돌의 2층 양옥집은 아니였지만 구석구석에 산뜻한 타일을 붙이고 반짝이는 니스칠을 해둔, 사는 사람들이 관리를 잘해서 한눈에 봐도 따스함이 풍겨나오는 그런 집이었다.

ㄱ자 구조의 꺽어지는 모퉁이에 위치한 안방은 아름이 할머니방이고 할머니방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대청마루, 왼쪽은 부엌이다. 너른 대청마루 너머에는 삼촌방과 아름이엄마방이 이어져 있었는데, 대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아름이엄마방으로 젤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이다. 아름이 엄마방 옆으로도 작은 부엌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름이엄마의 오븐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름이네 집에서는 어김없이 버터향과 계란향이 진하게 어우러진 카스테라의 냄새가 담벼락을 넘어왔다.

진한 버터향만 맡아도 부드럽고 달큼한 노오란 카스테라의 맛이 절로 느껴져 침이 고였다. 그러면 마법에 홀린 듯이 아름이네로 갔다.


물론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집에도 기름내가 고소하게 베인 김치전냄새가 우리집의 작은 부엌을 가득 풍기곤 다. 김치전보다도 비가 오는 날은 자전거를 타고 쥬스를 팔러 다니던 엄마가 일을 나가지 않고 집에 있어서, 나는 엄마의 김치전 냄새보다 하루종일 엄마가 집에 같이 있는 게 더 좋았다. 

버터향이 나는 카스테라냄새때문인지, 일을 나가지 않는 엄마와 종일 같이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부터 비오는 날을 좋아했던 것 같다.


아름이의 엄마는 우리 엄마랑은 많이 달랐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4남매를 키우느라 뼈마디가 굵어지고, 호락하지 않은 세상살이에 말투마저 억세고 투박해진 우리 엄마는 애정표현마저도 상스러운 욕지꺼리를 덧붙여 찰진 경상도사투리를 구사하는 매콤한 김치전같은 엄마였다.

반면에, 그 시절에 대학교까지 나왔다는 젊은 아름이의 엄마는 누가 봐도 상냥하고 친절했다. 나즈막하고 상냥한 서울 말씨로 어떤 뜬금없는 질문에도 웃으며 차근히 대답해주던 아름이 엄마는 노오랗고 부드러운 카스테라같았다. 화려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짧은 단발머리에 동그스름한 아름이엄마의 얼굴에는 늘 여유로운 미소가 배여서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특별한 비법같은 게 있는 사람이었다.


빨간색 색연필로 아름이의 연산 학습지를 채점해주던 아름이 엄마와 4남매를 좋은 학교에 보내겠다고 없는 살림에도 수성구 언저리 학군에 반지하같은 셋방에 이사를 온 우리 엄마도,  두 엄마들유일한 공통점은 자식교육에 꽤나 열정적인 엄마들이었다는 점이었다. 고등학생인 언니들이 있는 우리 엄마와 아름이 엄마는 교육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름이 엄마는 동네에 유일한 아름이의 친구였던 나에게도  친절했다. 내가 놀러오면 웃어 주었고, 아름이네의 무서운 할머니가 기분이 언짢아 계실 때도 미안한 표정으로 오늘은 밖에서 노는 게 좋겠다고 예쁘게 얘기해주었다. 그러면 나는 아름이 엄마의 미안한 표정에 왠지 존중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들은 신나게 뚝방아래로 뛰어가곤 했다. 그저 뚝방 아래를 달리고 돌멩이를 들추고 꽃잎을 따고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타는 일 따위로도 온종일을 놀 수 있는 우리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비가 와서 뚝방을 뛰어 다닐 수 없을 때, 아름이네 집으로 가서 주인이 없는 아름이 삼촌방 침대에 걸터앉아 버터향이 나는 카스테라를 포크로 쏙쏙 찍어 먹으며 동화책을 읽는 것이었다.

아름이 삼촌방에는 책이 많아서 나는 그 방을 좋아했다. 동화책을 몇 권씩 쌓아놓고 읽기도 하고 가끔은 아름이에게도 읽어주기도 하고, 또 같이 한 줄씩 읽기 놀이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름이 엄마는 신기한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언니, 오빠들이 많아서 늘 그냥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들이 많았다. 딱히 학원을 가거나 학습지를 하지 않았는데 그냥 학교를 갈 때쯤에는 글씨를 저절로 읽었고 언니들의 주판을 발에 끼고 스케이트를 타다가도 주판 알을 튕겨서 덧셈, 뺄셈을 하는 규칙을 찾아내곤 했다.

또 어깨너머로 저학년때부터 이미 고스톱을 치는 요령, 바둑, 장기, 체스 따위의 규칙들은 그저 언니 오빠들이 하는 것을 구경을 하다가 익히는 편이였던 지라, 아름이엄마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여러가지 것들을 곧잘하는 내가 신기했던 것 같다. 


아름이네 집에 있던 디즈니명작동화 시리즈는 내가 너무 좋아해서 가끔씩 우리집에 빌려와서 두고두고 읽기도 했는데 아름이 엄마는 늘 웃으며 책을 빌려주었다.

그런 대여의 추억으로 더욱 애틋했던 디즈니 명작동화책 시리즈를 딸이 글씨를 읽기 시작했을 때 꼭 같은 그림체의 명작동화책 찾아내어 나는 세트째로 구입을 했는데, 아마 내 첫 딸보다는 내가 더 좋아했었던 것 같다.

나랑 취향이 비슷한 내 둘째 딸이 - 언니는 크게 관심이 없던 - 디즈니 명작동화 시리즈를 늘 끼고 다닐 때,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생각이 나서 두 딸들이 대학생이되고, 중학생이 된 지금도 이  디즈니명작동화시리즈들을 버리지 못했다.

나의 상상의 나래 속에 펼쳐지던 공주님들의 세계와 어린시절의 추억을 딸들과 공유할 수 있음이 책보다 더욱 소중했다.


또, 아름이네에는 본채 말고 부엌  쪽으로 밖에 따로 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방에는 아무것도 없이 그냥 피아노 대가 덩그라니 놓여져 있었다.

겁이 나서 반짝이는 피아노를 뚜껑도 쉽사리 열어 보지는 못 했지만 아름이를 앞장 세워서 피아노방에 들어가서 그저 피아노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고 기분이 좋았다. 

학원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피아노를, 근데 나는 피아노학원도 다니지 않아서 피아노는 아름이네 집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런 귀한 피아노와 한 공간에 있기만해도 나는 벌써 투명한 하늘 빛깔의 반짝이드레스를 입고서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나를 상상할 수 있어서 진짜로 내가 공주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절 이런 소소한 즐거움과 오만가지 상상의 세계는 밝고 따뜻한 아름이네 집에서 가능했다. 다시 내게 주어진 현실 세계인 잿빛 콘크리트 마당의 어둡고 축축한 우리집으로 돌아 오면 마음 한 켠이 왠지 한없이 쓸쓸하고 허전해졌다. 

그런 헛헛함을 나는 늘 엄마를 기다리는 일로 채웠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엄마의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에 온 정신을 기울이는 일. 엄마를 기다리다보면 현실세계도 조금은 덜 외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희안하게 엄마가 집에 돌아오면 어둡고 쓸쓸했던 우리집도 어느새 활기차고 명랑한 공기들로 가득 채워졌다.



어른이 되고 연애도 하고 결혼을 할까말까 고민을 하고, 그러다가 또 아이를 낳아서 기르면서 나는 가끔씩 아름이네를 떠올렸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때도, 사실은  한 남자의 여자로써 어떠한 아내가 되어야겠다는 계획은 딱히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내가 엄마가 된다면 아름이 엄마처럼 되어야겠다는 엄마의 모습은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끔씩 "엄마는 꿈이 머였어?" 하고 묻곤 했는데, 희안하게도 직업이나 커리어적으로는 딱 이거다 싶은 내 꿈을 명확하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딱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저 아쉽지 않게 적당히 돈을  수 있는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적당하게 결혼해서 사는 것?쯤이 되고 싶었다. 제대로 된 인생의 청사진 하나가 없는 내가 한심했다. 그러다가 아이 셋이 되고 가끔은 나를 포기해도 내 아이 셋은 포기가 안 되는 나의 삶을  돌이켜 보다보면, 문득, 그래. 나의 꿈은 어쩌면 '아름이 엄마'같은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엄마의 내모습은 언제나 명확했다. 그리고 어이없지만 그러한 엄마로써의 포기는 그닥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기운이 더 났다.


 것은 적당히 가져도 되지만 아이들에게는 늘 넘치게 풍족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보낼 줄 아는 엄마. 집안을 들어서면 온 집을 환하게 금세 밝혀주는 엄마. 그것이 내 꿈이여서, 내게 주어진 모든 일에 늘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딱히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나란 사람의 꿈. 내 꿈은 아름이 엄마였나보다.

아무리 참아볼래야 참아지지 않는 찐 웃음은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였다. 그것이 답답하여 오로지 나만의 자아실현을 꾀해 보았지만 늘 제자리걸음인 이유는 나는 아름이엄마처럼 사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 아이들의 현실에는 당연히 예쁜 화단과 또 디즈니 명작동화 전집 세트, 그리고 마음껏 열어 제낄 수 있는 피아노까지 존재했지만,

또 다른 현실 이면에는 펜트하우스에서 살면서 백화점vvip인 엄마를 가진 아름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펜트하우스를 가지지는 못 했지만, 밝고 환하고 따스한 햇살에 둘러싸여 자라고 있는 내 아이들을 지켜보며 늘 상냥하게 대답해주는 엄마이길 꿈꾸어본다. 아름이엄마처럼.


화사하고 따뜻한 곳에 그때의 내가 있지 않았어도 충분했다.

그저 환하고 따뜻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나로 자라날 수 있는 것만으로 행운이었다.

세상의 어느 작은 화단의 한 구석이라도 화사하게 밝힐 수 있는 따스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참으로 가치있을 일일 것이다.

가끔씩 40년 전의 아름이네 집의 햇살이 환한 화단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미소를 짓듯이.

우리집의 공기도, 나를 둘러싼 내 세상의 공기도

 그렇게 따스하기기대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몇 해전 미술관에 갔다가 그 시절의 나의 뚝방길이 떠오르는 이 그림을 보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던 적이 있다.     <김인한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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