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해솔 Jul 22. 2023

내가 양을 처음 만난 건 열아홉 살 때였다. 이제 만 나이가 적용되니 만으로 치면 열여덟이다. 양을 처음 봤을 때, 양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 상의도 하얗고 하의도 새하얀, 양의 머리는 탈색을 해서 샛노랬다. 눈이 크고 쌍꺼풀이 짙었고, 전반적으로 선이 굵어 이국적인 얼굴이었다고 기억된다. 물론 양은 토종 한국인이다. 양은 팔에는 갈색 염주를 차고 있었고, 귀에는 십자가 귀걸이를 걸고 있었다. 그때 양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몇 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1. 양이 대뜸 내게 전화를 걸어 호러 연극을 보러 가자고 했다. 대학로에서. 그때 나는 갈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양이 지금 배터리가 없으니 몇 시까지 몇 번 출구 앞에서 보자고 했다. 안 오면 그냥 자기 혼자 갈 거라고. 그리고 뚝 끊었다. 그 연극이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만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양이 늦게 와서, 내가 먼저 출구에 도착해 양을 기다렸던 것은 기억난다. 2. 양이 내 일기를 훔쳐 달아났다. 건대 입구 주변에서였다. 카페에서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대뜸 그걸 훔쳐 밖으로 달아난 것이다. 나는 양을 쫓았고, 때문에 우리는 경찰과 도둑잡기 게임 같은 추격전을 건대 입구 한복판에서 벌이게 된다. 나는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저 사람 좀 잡아달라고 사람들에게 소리치기까지 했다. 당연히 아무도 잡아주지 않았는데, 양은 그렇게 자신을 쫓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막 잡혀줄 것처럼 속도를 늦추기도 하면서. 그때 나는 양이 진짜 Me 친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에피소드는 이제 내가 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된다. 그 이후에도 양과 나는 종종 만났다. 같은 해에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으니까. 졸업 이후에도 종종 만났다. 나는 자주 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양은 언제 어느 때에 전화를 걸어도 전화를 받아주고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체로 내게, "넌 너무 이상해!" 하면서. (지는?) 이번에 만났을 때도 양은 내게 말했다. "하하, 너랑 만날 때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는데, 그대로라 웃겨. 그래도 예전이랑 비교하면 많이 변했어. (어디가 변했는데? 나 예전엔 어땠어?) 예전? 예전이라고 하면 언제? 내가 널 정말 오래 봤잖아. (맞아. 우리 진짜 오래 봤다.) 음, 10대 때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해 보면, 광기? 이런 게 정말 심했달까? 그런데 그대로인 점도 있어." 이번에 양과 만났을 때 양은, 내가 다니는 학교에 놀러 왔다. 나는 양과 함께 학식을 먹고 학교를 구경시켜 주었다. 그리고 카페에 갔다. 에어컨이 아주 빵빵하게 나오는 카페라, 우리는 둘 다 담요를 뒤집어썼다. 담요를 뒤집어쓴 채 양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문득, 나는 양과 나의 세계가 달아졌음에도 양이 내게 소중한 친구임을 자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타임 스퀘어 광장에 갔다. 타임 스퀘어 광장에는 커다란 원형 바위가 하나 있다. 나는 그 위에 누워서, 하늘을 봤다. 타임 스퀘어 광장의 구조상 바위 위에 누우면 하늘도 원처럼 보였다. 천천히, 원을 따라 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곧 태어날 양의 아이가 궁금하다고. 양을 닮았으면 분명 천방지축하고 이상하며 그렇기에 사랑스러울 거라고. 그리고 양은 분명 좋은 아빠가 될 거라고. 곧 태어날 양의 아이는 혼혈아다. 때문에 엄마와 아빠의 성 씨를 둘 다 이름에 쓸 시에는 성 씨가 무척 길어진다. 그렇게 곧 태어날 양의 아이의 성(엄청나게 긴)을 듣고, 나는 그 아이의 성이 곧 그 아이의 이름이 되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멋진 성이었고, 누가 봐도 양의 아이일 것 같은 이름의 성 씨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