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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람 May 06. 2023

희생의 대물림?

oo처럼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oo을 닮아간다.

2023년 5월 5일

어린이날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 중엔 어린이가 없기 때문에 딱히 의미는 없다. 조카가 있다면 조카에게 용돈을 주는 날은 될 수 있겠지만 조카도 없다.


오늘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우리 가족, 그리고 외삼촌네 가족까지 온천여행 비스무리 한 것을 왔다. 최근에 엄마는 근무지에서의 사고 때문에 뼈에 금이 가서 팔을 쓰는 게 힘든 상태다. 그런 엄마와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와 함께 간 목욕여행. 처음부터 녹록지 않을 거란 생각은 있었지만 정말 녹록지 않았다.


예전에는 장녀 콤플렉스라거나 장남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인터넷으로 봤을 때 사실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베푸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긴다는 걸 알고 있지만... 스스로에게  장녀 콤플렉스 또는 장난 콤플렉스라는 진단을 내릴 정도면 그들 스스로 자신의 희생이 부담스러운 상태일 것이다. 내면을 갉아먹으면서까지 타인을 위한 어떤 행동을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콤플렉스란 카테고리 안에서 계속하는 이들이 속된 말로 바보같이 느껴졌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계쏙하고 그만두는것이 그 자신의 의지로 가능할 거라 생각한 어렸던 김알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러명의 형제, 자매를 가지고 있지만 부모님에 대한 걱정은 최고인(솔직히 다른 분들의 심리를 알 수 없으니 이것도 내 짐작일 뿐이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이라면 우리 엄마가 다른 남매들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횟수로 외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러 간다. 직장에 다니고 있음에도 말이다.) 엄마를 옆에서 보는 나의 마음은 미묘하다. 엄마가 그렇게 희생적이지 않았으면 나는 엄마에 대한 연민을 지금보다 덜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자신의 엄마에게 하는 헌신만큼 나에게 바라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부담스럽다. 이런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어차피 이번에 내려온 것은 일종의 효도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지만,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기가 너무 빠져서 다시는 이렇게 여러 대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사람이 자라며 가장 가까운 동성 롤 모델은 부모님일 때가 많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소규모의 집단으로 섣부른 일반화를 하자면, 대체로 딸이 아들보다 부모님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님 세대는 지금처럼 자식을 하나 혹은 둘만 낳아서 아들이던 딸이던 공주와 왕자처럼 키운 세대는 당연히 아니고. 은연중에 혹은 확실하게 가시적으로 딸과 아들의 차별이 만연했던 시기인데 이런 현상이 참 신기하게 느껴지긴 한다. 대우받은 사람은 대우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부채감을 느끼지 않고, 대우받지 못한 사람은 대우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가 더 잘하면, 나를 저만큼 아껴주겠지'란 불가능한 희망회로를 돌려서일까? 그저 보이는 것으로 짐작만하는 나로선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몸이 불편한 엄마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일을 하려고 하는 걸 놔두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엄마가 안타까워서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동안 '바로 그런 식으로 딸에게서 딸로 희생이 대물림 된다'라고 주장했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일까. 아니, 이런 상황 안에서 옳고 그름이란 것은 없다. 무엇이 나에게 더 좋은 것일까. 모르겠다. 어린 날의 나는 사회에 만연한, 은근히 딸에게 부가하는 부채감을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서 사회의 타성에 젖어든 것일 수도 있고, 부모님이 생각보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느낀 자식으로서의 회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내가 조금 힘들어서 다른 가족들을 편하게 하는 일을 나의 기쁨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르겠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내가 하는 행동들이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도. 어쩌면 자식으로서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걸 부담스럽게 느끼는 내가 돼먹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 다만 어린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그 콤플렉스를 가진 어른이 이제는 나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들로 느껴지진 않는다. 


오랜만의 외가 집안(?) 모임에서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글을 쓰는 동안 감정이 과잉된 감이 있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인생은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사실뿐이다. 아... 모르겠다. 이럴 때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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