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매일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알람 May 05. 2023

오랜만에 외조부모님 댁에 왔다

고속버스에서 <여자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를 보다

*이 일기는 넷플리스 다큐멘터리 <여자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와 영화 <마스터>의 내용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3년 5월 4일

오랜만에 외가댁으로 내려왔다. 통영 여행을 갈 때 고속버스를 오래 타 본 경험이 있어서 자신만만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이번의 버스 경험은 조금 힘들었다. 특히 서울을 나가는 길이 꽤 막혔는데 그나마 다행히도 서울 인근이라는  마의 구간을 넘어서니 속도가 나서 예상 도착 시간을 많이 오버하지는 않았다.


사실  외조부님 댁에 내려가는 것도 퇴사 후의 버킷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퇴사 전에도 한 번 내려가야지 내려가야지 생각만 했었는데 막상 휴일이 되면 쉬고 싶은 마음에 정말 오랫동안 방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퇴사 후에 꼭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일들 중에 진짜로 한 일이 별로 없다.   외조부님 댁을 방문하는 것만이라도 예상대로 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1년 만에 넷플릭스를 이용했다. 엄마가 영화&드라마 콘텐츠의 헤비 이용자라서 구독을 유지했을 뿐 거의 유명무실했었는데 오랜만에 다큐멘터리를 보니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여자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다큐인데 2012년에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로나이아 투아이소소포의 인터넷 사칭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2012년, 유망한 미식축구 유망주였던 맨타이 테오는 자신의 할머니와 여자친구가 같은 날에 사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아픔을 딛고 더욱 뛰어난 성장을 보여준 그의 이야기는 감동 실화 그 자체였고, 대중은 맨타이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사실 맨타이의 여자친구인 '레나이'는 존재하지 않는 여자였다. 맨타이와 '레나이'는 sns를 통해서 서로를 알게 되었고, 3년의 연애동안 그들이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그럼 3년 동안 도대체 어떻게 사귄 거야? 란 생각이 들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누군가 이런 정도의 공을 들여서 나를 속일 거란 생각을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맨타이의 감동 실화가 사실은 완전히 허구였음은 마이너 언론에 의해 폭로된다. 그들은  이 특종을 통해 '사실 확인도 없이 감동 실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기사를 써낸' 주류 언론사를 비꼬고 싶었다고 하지만 폭로 이후의 상황은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유망한 대학 미식축구 선수였던 맨타이는 비꼼과 조롱의 아이콘이 되고, 밈이 되어 인터넷을 돌아다닌다. 1군 선수로서 프로 입단이 당연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맨타이는 1군 팀들에게 지명받지 못한 채 2군 팀으로 데뷔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그는 당연히 다라올 것으로 생각했던 막대한 계약금과 연봉, 그리고 뛰어난 경기력의 핵심이었던 자기 확신을 모두 잃은 채 프로가 된다. 그리고 경기에 설 때마다 발끝에서부터 감각이 사라지는 정신적인 문제를 안은 채 3년을 보내고 카운슬러를 찾는다. 

  

다큐멘터리의 끝에서 맨타이는 자신의 상담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한다. '로나이아를 용서하나요?' 맨타이는 '네'라고 대답했다. '그럼 당신 자신을 용서하나요?' '뭐라고요?' '당신 자신을 용서하나요?' 그는 그제야 자신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큐멘터리는 하와이에서 사는 폴리네시안들이 공유하는 세 가지 핵심 가치를 이야기하며 시작된다. 신앙, 가족, 그리고 풋볼이다. 풋볼 장학금을 받는 것 외에 이들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폴리네시안 남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풋볼 선수가 되기 위해 훈련받는다. 신앙과 가족, 그리고 운동이 핵심 가치인 이 공동체에서 자란 아이들은 일종의 성전사 같은 느낌을 준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중 하나인 맨타이의 모습을 보는 동안 영화 <마스터>가 생각났다. 이건 과학적으로 전혀 밝혀지지 않은 나의 뇌내 망상인데, 나는 신앙심과 사회적으로 훌륭해 보이는 인간 사이에는 정적 상관관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정적 상관관계의 핵심은 바로 외부의 주인(=신=마스터)의 존재 유무다. 다시 영화 <마스터>로 돌아가보자. 사이비 종교의 '마스터'와 그의 추종자인 주인공을 다룬 이 영화는 마스터와 추종자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있는데 영화 속에서 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굉장히 흥미롭다. 영화의 초반부에 '마스터'는 굉장히 매력적이고, 정말 이 세계 사람을 너머서는 무언가를 지닌 초월차처럼 보인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 광명은 사라지고, 그는 인간의 위치로 추락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실 그가 인간이 된 것은 마스터 자신이 무슨 일을 했고 안 했고 와는 관련이 없다. 신이었던 그를 인간으로 만든 것은 바로 추종자다.  마스터가 그저 인간이라는 것을 추종자가 깨닫기 시작했기에 마스터는 인간이 된다. 추종자가 그를 신으로 바라보았기에 신이 되었던 것처럼.


'신은 신을 믿는 사람에 의해 힘을 갖는다'는 말처럼 마스터는 추종자의 믿음을 통해 완벽해진다. 추종자는 마스터에 의해 세뇌되고, 마스터는 추종자에 의해 '마스터는 완벽하다'는 역세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묘한 공생관계의 키는 마스터가 아닌 추종자에게 있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마스터는 완벽하다'라고 믿는 추종자가 마스터에게 주는 영향이 마스터가 추종자에게 건네는 믿음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영화 <마스터>를 보면서 사실 BDSM(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나오는 그 SM 맞음)과 종교는 같은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구나란 생각을 했다. 성적(섹슈얼적인 것)인 면을 제외하면 그냥 비슷한 게 아니라 거의 일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노예 상태일 때 가장 우수하다. 그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사람보다 대체로 더 우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계발은 소홀히 하지만 회사의 일이라면 생명력을 갈아서 결과물을 내는 이유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믿음이 외부에 있을 때, 인간이 가장 성실하고 또한 건실해지는 이유는 뭘까? 왜 인간은 주인일 때보다 노예일 때 더 완전한 것일까? 그건 외부의 마스터에게 주도권을 위임하는 행위가 '불완전한 인간인 내가 만들어낼 불안정한 선택들'을 두려워하는 인간 본연의 '불안감'을 소거시키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신을 갈구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내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명령할 존재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신의 존재를 과학이 대체한 것은 예상가능한 일이다. 이런 생각 흐름의 연장선으로, 지금은 AI가 일종의 놀잇감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나중에 AI가 '무신론자들의 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영화 <마스터>의 결말이 암시하듯 인간은 노예로서 가장 완전하지만 동시에 불안한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어쨌거나 노예와 주인의 복합, 그것이 인간이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 <마스터>에 대한 내 평가는 흥미롭지만 불쾌한 지점이 있는 영화였다는 것이다. 내게 이 영화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또 왜 영화 <마스터>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곳에 노트북을 가져올 수 없어서 태블릿과 무선 브루투스 키보드를 이용해 일기를 쓰고 있는데 굉장히 불편하다. 요즘 태어난 아이들은 휴대폰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게 당연하다고 하던데 아직까지 나는 모바일이나 태블릿보다 노트북이 훨씬 편하다. 그 와중에 싸구려 블루투스 키보드에 타자 밀림 현상까지 있어 더 괴롭다. 불편한 것 치고는 굉장히 긴 일기를 쓰게 되었다. 이게 일기인지 영화 감상문인지 정체가 헷갈리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오늘의 일기를 마치겠다. 그럼 이만.

매거진의 이전글 30대가 되어도 철이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