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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령 May 14. 2024

나의 주거문화사 9

 아버지는 쌀 두 되를 훔쳐 집을 나왔다고 했다. 그 때 아버지의 등 뒤에서 작은큰아버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큰아버지의 말이 아니어도 아버지는 되도록 멀리 갈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밤새도록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멀리 가지 못했다. 면面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집을 벗어났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집을 떠나 몸을 의탁한 곳은 아버지의 작은어머니의 집, 그러니까 작은할머니의 집이었다.


 작은할머니의 중매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났다. 어머니는 작은할머니의 집에서 일이란 일은 혼자서 다하고 팔자에도 없던 모자란 시동생들을 돌보고 그러고 나서도 당신 몫으로 돌아오는 게 아무것도 없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은할머니의 집을 나왔다. 오륙 십 리의 길을 걸어 산번지 집이 있는 마을, 어머니의 친정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 때 아버지와 헤어졌어야 했지만 그 당시의 관습으로는 용인되지 않았다. 외삼촌이 경운기를 끌고 작은할머니의 집으로 가 얼마 되지 않는 세간을 가져왔다. 경운기 짐칸에는 나의 아버지도 ‘실려’ 있었다. 


 그 일이 아버지에겐 나름대로 수모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처가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 집 저 집을 떠돌다가 산번지의 집으로 간 것이고 다 변변찮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분가 형식이었다. 아버지는 진짜 ‘처가살이’를 한 적이 없었지만 술을 마실 때마다 ‘처가살이’에 대한 한풀이를 했고 어머니를 상대로 분풀이를 했다. 


 제발 술 먹고 어디 가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 유난한 겨울이었다. 아버지가 밥상을 엎고 어머니를 두들겨 패고 제 분을 못 이겨 옷을 다 벗은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잠이 든 날, 나에게 힘이 있다면 잠든 아버지를 그대로 들어다가 눈 쌓인 길바닥에 갖다 버리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엄마, 난 괜찮으니까 엄마 집을 나가. 나중에 나 찾으러 와. 


 나는 엄마한테 그렇게 말했다. 엄마가 울었다. 나도 엄마를 따라 울었다. 


 그리고 눈발이 창호를 세차게 때리던 겨울밤, 그 때 아버지가 잠깐 깨어 모자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만 같다. 



 눈은 쌓이고 쌓여 모든 길을 지웠다. 나는 맨발로 눈밭을 달려가고 있다. 누구인가에게 쫓기고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한참을 달려가다 우뚝 멈춰선다. 수북하게 쌓인 눈 때문에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길바닥에 무엇인가 있다. 발로 툭툭 건드려보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 때 눈이 조금 흘러내리면서 뭔가 보인다. 들짐승의 등뼈다. 나는 깜짝 놀라 쌓인 눈을 치운다. 순록이다. 아직 숨이 붙어 있어 윗가슴께가 희미하게 두근거린다. 나는 순록의 앞다리를 잡고 순록을 일으켜 세운다. 순록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산타클로스의 여정에서 낙오된 순록이다. 순록이 천천히 직립한다. 나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도망친다. 순록이, 네 발이었다가 두 발이었다가… 눈밭을 달려온다. 되도록 멀리 가라,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리지만 나는 더이상 갈 데가 없다. 막다른 곳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버지가 서 있다. 제발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마. 용서해버릴 것 같잖아. 나는 끝내 울고 만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아주아주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 내가, 그 시절, 겨울밤의 모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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