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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령 Jun 07. 2024

나의 주거문화사 10

산번지를 떠나며

 산번지의 집을 떠난 건 내가 열두 살 때였다. 열두 살에도 여전히 그 집은 우리집이었지만 가겟방에 따로 살림을 차리게 되면서, 그리고 말년에 막내아들에게 몸을 의탁하러 내려왔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 집에 갈 일은 거의 없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가끔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꿈꿀 만한 집이 아니었다. 집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지만 더 멀리 있었고 높은 곳에 있었다.


 이사라는 번잡한 절차가 없었지만 나는 가겟방으로 이사를 간 것이라고 여겼다. 가끔 산번지의 집을 올려다보며 그곳 마당에서 나를 부르던 어머니를 생각하곤 했다. 밥 먹으라고, 허리를 꺾어 내 이름을 길게 부르던 어머니, 집 뒤안에는 대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어머니는 꼭 잔뜩 휘어진 대처럼 보였다. 대는 바람에 절대 꺾이지 않지만 어머니의 허리는 금방이라도 꺾여버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어머니가 쌀 가마니인가 다섯 가마니를 주고 얻은 집, 명의 변경도 안(못) 해서 정말 우리집이었나 싶었던 집, 어머니의 선연한 핏자국을 보았던 집, 열한 살인가, 열두 살인가, 내가 거지 같은 집구석, 이라고 말했던 집, 어머니가 보따리를 싸들고 나갔다가 나 때문에 돌아왔던 집, 엄마, 도망가, 난 괜찮으니까, 대신 나중에 찾으러 와, 라고 말했던 집, 할머니가 눈을 감았던 집, 아버지가 울었던 집, 내가 친구들을 한번도 데리고 오지 않은 집, 정말 거지 같았던 집, 그러나 오월이면 아카시아 꽃향기가 물큰하게 퍼졌던 집, 그 향기를 맡으며 내가 하루종일 책을 읽었던 집, 지붕 위에 박이 열렸던 집, 겨울이면 뜨끈뜨끈한 아랫목에서 동생과 함께 어린 물고기처럼 헤엄치던 집, 어머니가 수선화를 심었던 집, 수선화라는 이름이 너무 예뻐서 그 앞에 앉아 그 꽃을 한참 바라보던 집, 내가 살던 집,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랐던 집, 그리고 내가 울던 집, 그 집을, 어머니도 떠난다, 라고 생각했을까.      


집은 떠나고 돌아가고 또다시 떠다니는 곳

얼고 녹아 또 다른 모양으로 지붕을 쌓는 곳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어도 살 만한 곳     


허주영, 「수소문」 부분,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 민음사          



 집은 원래 떠나는 곳이고 돌아오는 곳이다. 떠다니는 곳이고 돌아가는 곳이다. 산번지에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에도 있고 어디든 떠다니며 살았다. 없어도 살 만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실제로 없었던 적은 없다. 그렇게 있었다. 산번지에도 있었고 깔끄막을 내려온 새마을 터(131번지)에도 있었고, 밤나무가 대여섯 주 서 있던 밭을 갈아엎은 곳(49길)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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