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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e Dec 13. 2023

12월 27일=Public Holiday, 호주 워홀

2016.12.27.


 여러 고민 끝에 시드니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시드니에 며칠 지내면서 내가 과연 도시에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컸다. 브리즈번이 대표도시 중 하나긴 하지만, 분명 시드니 보다는 덜 붐빌 테고, 안되면 농장일이라도 구하기 쉬울 거란 생각이었다. 게다가 브리즈번에는 동갑내기 친구 동산이가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약간 더 의지되는 것도 있었다. 물론 시드니에서도 영준이가 있고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앞으로도 그러는 게 스스로도 찔리고 부담스러웠고, 조금 더 편한 친구가 떠오르는 것도 한몫했다.


 이제 결심이란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방법을 찾기로 했다. 떠나는 방법이야 몇 가지 안 되지만 앞서 평소보다 두세 배는 뛴 비행기삯이 너무 비싼 관계로 고민하던 찰나, 백패커에 새로 들어온 한국인 부자(父子) 여행객인 종0아버님이 조언을 해주셨다.

그러면 버스나 기차로 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그냥 넘겼을 수도 있지만, 무려 멜버른에서 시드니까지 버스로 왔다는 이 부자 여행객의 후기는 뭔가 더 신뢰가 갔기에 알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중에서 무언가를 고를 때 한 번에 모든 걸 만족하는 경우는 없다는 걸 느꼈다. 비행기는 비싼 대신 소요시간이 짧고, 버스나 기차는 가격이 싸더라도 소요시간이 너무너무너무 길었다. 차라리 돈으로 시간을 산다고 여긴다면, 평소보다 손해를 봤다 쳐도 비행기가 가장 베스트 옵션이었다.

 머릿속이 돈돈돈 하고 있지만 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감수하려면 할 수도 있었지만, '돈도 못 번 주제에'라는 생각이 들고나니 약간의 죄책감 때문인지 다른 방도를 찾아보자고 한 발짝 뒷걸음치게 되었다. 내가 교통편 고민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종0 부자 여행객과 칠레 청년 Mariano는 내일 아침 블루마운틴을 구경 간다고 했다. 살 셰어하우스를 알아보다가 Manly beach도 다녀온 나지만, 중요한 거취를 앞두고 알아봐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생각에 가고 싶었던 곳이지만 이번에는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와 룸메이트들과 차이점을 생각해 봤다.

'아 저 사람들은 다르겠지?
난 일개 워홀러고, 저 사람들은 여행객이고.
그래, 일단 내 살길이나 찾자.'


 2-3년 영어학원 다니고도 영어로 뭘 하지 못하던 게 아쉬워서 워홀을 온 나, 뉴질랜드 어학연수 중에 홀리데이를 보내러 온 Mariano, 아들의 부사관 임관 전에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호주로 여행을 오게 되었다는 종0가족. 뭔가 씁쓸한 느낌이 들더니 왠지 모르게 그들에게서 반짝이는 후광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방 안의 분주함에 놀라 눈이 껌뻑 떠지고 나니 벌써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같은 곳인 블루 마운틴을 향한다고 했지만, 이미 Mariano는 나가고 안 보이고, 부자 여행객이 나갈 채비하던 차에 내가 깬 모양이다. 잠결에 '잘 다녀오세요'하고 인사를 건네고 눈을 감았다 떴는데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사람들이 방을 나선 게 꼭두새벽이었는지 그렇게 자고 일어났어도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나도 뭐라도 알아봐야겠단 생각에 샤워실에 들러서 씻고, 버스 편을 알아보러 버스 터미널에 가보기로 했다. 백패커가 Central Station 옆이다 보니 다행히도 버스 터미널도 기차역도 근처에 있어서 금방 찾아갈 수 있어 보였다.

"PUBLIC HOLIDAY"


왜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던가?

가까운 건 문제가 없었는데 다른 문제가 터졌다. 심지어 'OPEN 7 days, 6:00 am - 6:00 pm'인 곳에서, 하필 내가 찾은 날만 closed라니. 성탄절이 일요일이었어서 26일 정도만 대체 휴일로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27일까지 쉬는 건 예상밖 일이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절로 깊은 한숨이 내쉬어졌다. 버스를 알아보는 건 이렇게 공쳤고, 근처 기차역 사무실이라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기차역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이곳 사무실은 잠기지 않았다. 입구 쪽에서 안에 사람이 있는지 기웃 거리며 들여다보는데 자동문이 활짝 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홍당무가 되었다가 눈알을 두세 번 굴린 후 아무렇지 않은 척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고 보니 입구 쪽엔 아무도 날 볼 사람이 없었고, 사무실 가장 안쪽 창구에만 세네 사람이 줄지어 서있었다. 앞사람 뒤에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고민하다가 내 차례가 되기 전에 뒷사람에게 양보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물어보지?'하고 생각하다가 뒷사람에게 또 양보했다. 그러고 나서도 내 차례가 되기 전에 뒷걸음질 쳐서 서있던 줄에서 빠져나왔다. 갑자기 영어울렁증이 또 터지고 만 것이다.

 생각은커녕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사무실 안까지 들어와 놓고선 영어울렁증이라니…. 얼굴은 아닌 척 미소를 지으려는데 가슴은 쿵쾅쿵쾅 요동치는 심장을 붙들어 맬 수는 없었다. 돌아갈까 하는 생각에 다시 자동문 앞에 섰더니 자동문이 활짝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여기까지 와놓고선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가면 아깝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시 두 눈 질끈 감고 창구로 향하려는데 이번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걱정이 불안을 낳고, 불안이 점점 커지더니 두려움이 나를 삼켜버렸다.

'저 스태프들은 내 말은 아무것도 못 알아들을걸?'


스스로를 의심하는 경지에까지 이르자 창구는 이미 포기하고 에먼 사무실 벽을 바라보는데 게시판에 Luggage check-in 안내글이 보였다.


 Luggage check-in을 보니 Maximum 2 items라는 안내문이 마음에 걸렸다. 내 짐은 Suitcase 하나에 스포츠가방 하나, 노트북 가방에 백팩까지 있으니 이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확인은 하지 않고서 '그럼 기차는 안 되겠네'하는 생각에까지 이르자 창구로는 떨어지지도 않던 발이 출구로는 부리나케 떨어졌다. 결국 한 마디도 붙여보지 못한 채, 한 번 물어보면 끝날일을 앞에 두고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발끝부터 머릿 끝까지 초라함이 가득 차더니 온몸이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드. 호주를 온 이유가 어떻게든 영어를 더 써보겠다고 와놓고서는 말 한마디 못 걸고 이렇게 전전긍긍이라니…. 이제 겨우 일주일 뿐이긴 했지만, 지금 안된 게 앞으로도 안 될 것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들고나니, 금세 마음속이 새까맣게 타버리는 것 같았다. 버스 터미널도 공치고, 기차역도 공쳤지만, 무슨 용기인지 그냥 들어가기엔 아까운 생각에 은행도 들러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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