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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e Feb 04. 2024

세 번의 허탕, 주사위를 던지다, 호주 워홀

2016.12.27. Public Holidy in Aus


'Holiday notice'
This bank will be closed on…


불 꺼진 상점들이며 조용한 거리부터 대충 감은 왔다. 혹시나 열었을까 하는 마음에 은행도 들러보려는 것이었는데, 역시나 은행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버스, 기차, 은행, 연달아 세 탕의 허탕. 예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럴 거였으면 그놈에 돈타령 보다 어젯밤에 대충 비행기표 예약이나 해놓고, 새벽녘에 사람들 따라서 블루 마운틴(Blue mountain)이나 따라갈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일종의 바람 같다. 마음속 표지판은 이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데, 자꾸만 그 길 말고도 다른 길이 있을 거라는 스스로에 대한 최면, 기대, 희망. 그러다가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뀌고 나면, '그럼 그렇지' 하고서 돌아서기도 하고, '아닐 거야' 하고서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나, 평소에 나 같았으면 머물고 또 맴돌고 했을 텐데, 그러기엔 호주에서의 시간이 조금 벅찼다. 마침 뱃속에서 꼬르륵 신호가 왔다. 마음에야 이 기분을 날려줄 맛드러 진 고가의 음식을 사 먹고 싶었지만, 비행기 표 값 아낀다며 이 난리를 치고서도 함부로 돈 쓸 생각을 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다가 곧 Suitcase에 처박혀 있을 비상식량이 떠올라서 그걸 먹기로 했다.


다시 돌아온 백패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Suitcase에서 햇반과 고추참치를 꺼냈다. 영국에서 교환학생 중인 현중이가 해외 나가서 초반에는 돌아다니며 사 먹는 게 부담일 수 있으니 챙겨 가는 건 어떻냐고 해준 조언이 이렇게 빛을 발하게 됐다. 물론 처음에는 외국 음식을 적응해 보자며 햄버거니 나초, 핫도그 같은 걸로 때웠는데, 오랜만에 고향 생각나는 밥다운 밥을 섭취하고나니 허전한 마음이 제법 채워지는 것 같았다.


배도 부르고, 드는 생각도 많았지만 잠시 접고 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끌 시간도 없거니와 이제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접어뒀던 노트북을 열었다. 다소 즉흥적인 결과이자 결심이지만 비행기를 예약하기로 했다.


"Your No.###### booking is confirmed.
For full details please refer to the attached Travel Reservation.


이렇게 순식간에 끝날 것을 그동안 이렇게 질질 끌고 있었다니... 순간 허탈하기도 머쓱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악착같이 부여잡고 있던 한쪽 선택지를 이제는 스스로 놓아버렸다는 점이다.


표값이 비싼 것은 알았지만 두 눈으로 평소보다 세 배는 뛴 가격표를 보니 이게 맞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가성비를 신경 쓰며 고른 표, 가격이 싼 대신에 환불도 변경도 안되는 옵션이라 이제 시드니는 떠나는 건 확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호주에 온 지 일주일 만에 또 비행이라니... 평생에 없을 비행기 복을 여기 호주에서 다 받는구나 싶었다. 아차차, 저 짐은 어떻게 또 다 들고 가냐 하는 걱정이 들었다. 게다가 호주 국내선이면 다 영어로 해야 하는데, 그제야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을 꺼내 들기 시작하니 줄줄이 걱정이 딸려 나왔는데, 무엇보다도 뽑아줄지 않을지도 모를 공장을 믿고서 지역이동이라니... 너무 큰 도박이 아닌가 싶다가도, 그래도 주사위를 던지기는 던졌으니 운명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하루종일 난리를 치고 나니 오후 네 시가 훌쩍 지났다. 시드니에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어디 내로라하는 랜드마크를 가볼까 하다가도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고민하다가 갑자기 소고기를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갔던 Darling Harbour? No, Bondi beach? No, 얼마 전 인스펙션 하다가 지나쳤던 초록색 식물로 뒤덮여있던 건물에 가보기로 했다. 거기 Woolworth 표지판이 있었으니 말이다.


Woolworth를 처음 간 건 아니었다. 다만 여태까지는 외국에 나와놓고서도 외국인한테 말 거는 게 무서워서 셀프 계산대만 사용했었는데, 웬 바람이 든 것인지 어차피 시드니도 떠날 것이란 생각 덕분인지 계산대의 점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점원: "Hello, #@#*@&(%^*#"
나: "(???)"


헬로 말고는 하나도 안 들렸다. 대충 10불짜리, 두 덩이가 든 소고기를 집어 들고 왔다. 어색한 미소로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를 시전하고 있는데, 점원 모습이 오늘따라 더 흉악해 보였다. 다른 점원이 있었다면 여기로 안 왔겠지만, 휴일이라 겨우 하나만 유지되는 계산대라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충 아까 봤던 가격표에 맞춰 현금을 꺼내 전달했다. 또 무언가 쏼라쏼라 물어왔지만 대충 계산은 끝난 거 같아서 '쏘리쏘리' '땡큐땡큐'하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이 마트를 빠져나왔다.


숙소에 와서 고기를 구웠다. 본래는 미듐으로 구워보고 싶었는데, 웰던을 넘어 웰웰던이 된 고기는 명절에 먹던 꼬치맛이 났지만 호주에서 스스로 처음 구워본 스테이크라 그런지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기도 고기였지만, 처음으로 셀프 계산대가 아닌 점원이 있는 곳을 향했던 것도 왠지 스스로 세워뒀던 두려움의 벽을 하나 허문 게 아닌가 하고 괜히 신이 났다. 숙소 카페테리아에서 고기를 썰고 있는데 블루 마운틴에 갔던 부자 여행객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매번 어디를 갔다 오거나 해야 하루를 괜찮게 보낸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나는 그렇지 않았는데도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결심(決心), 결단(決斷). 이전의 마음을 끊어내고 나니 잠시나마 다소 가벼워진 모양이다. 그래, 이제 진짜 다시 시작이다!



몇 번을 봤어도 지나치기만 했던 Central station의 크리스마스 트리. 허탕친 김에 사진이나 남겨보자며 찍어둔 사진. 호주 크리스마스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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