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28.
처음 호주에 도착할 때는 공항 픽업*을 구하지 않았다. 예약해 둔 숙소가 중심부에 있는 데다가 지하철과 도보로도 충분히 갈 수 있다는 소개가 있었고 도착 예정시간이 낮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공항픽업을 미리 잡았다. 이번 브리즈번 도착 예정시간은 밤이었고, 무엇보다도 이 많은 짐을 낑낑대며 들고 가는 게 싫어서 돈이 더 들더라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한 푼도 못 벌고 있는 워홀러로서 이런 과소비는 용납할 수 없긴 하지만, 살아남는 게 우선이니 스스로에게 투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새 숙소는 수영장까지 딸린 아파트라고 했던 게 떠오르니 왠지 모르게 발걸음도 더 가벼워지는 거 같았다.
설 귀경길을 방불케 하는 시드니 공항에서 홍역을 치르고 난 뒤 마주하는 브리즈번 공항이라서 그런 걸까? 예상보다 더 작은 크기에 놀랐다. 거짓말 좀 보태서 공항에 마치 이번 비행기 탑승객만 있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어벙벙하는 것도 잠시, 휴대폰을 뒤적이며 비행기 모드를 껐더니 부재중 통화가 몇 통 걸려온 게 보였다. 아차 싶은 마음에 바로 전화를 걸었더니 역시나 공항 픽업 오신 분이 준 연락이었고, 도착시간에 맞춰 대기하고 계셨다고 한다. 어디로 나가면 될지 물음에 입구에서 곧장 나와서 횡단보도 건너편에 사람들이 차 대놓고 있는 곳이 있을 거라며 거기서 다시 연락을 달라고 했다. 어두컴컴한 공항 밖을 나서며 들었던 대로 나가보니 정말 차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고, 전화를 거니 두 칸 뒤쯤 서있던 차에서 누군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차에 다가서니 운전석에서 '안녕하세요'하는 인사와 함께 내리시더니, 28인치 내 캐리어를 번쩍 들어서 트렁크 안에 집어넣고, 남은 짐도 뒷좌석에 옮겨주시더니 조수석으로 안내해 주셨다. 얼떨결에 짐도 다 나르고 한순간에 가벼워진 덕분인지 가뿐한 마음으로 조수석으로 안착했다.
* 공항 픽업
개인이나 업체가 공항에서 시티, 혹은 목적지까지 옮겨주는 서비스이다. 거리에 따라 요금은 달라질 수 있으나 약속된 경비가 있는 만큼 Uber나 택시보다 더 편안할 수 있다. 단점은 사전 예약 및 조율이 되어야 한다는 점으로 일정을 확정 지을 수 없거나 변경 가능성이 있다면, 바로 부를 수 있는 Uber가 나을 수 있다. 다만 대중교통이나 Uber 운행시간이 아닌 경우, 공항이 도심지와 접근성이 떨어지는 경우에는 사전에 픽업서비스를 알아보는 게 좋다.
한국에서 택시도 잘 안 타는지라 처음에는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호주 공항에서 출발하는 대부분의 이동수단에는 추가요금이 붙는 편이라 오히려 픽업이 더 저렴할 수도 있다는 점에 놀랐다.
호주로 워홀 간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뭘까? 바로 '한국 사람 조심해'라는 말이었다. 타국에서까지 남을 등쳐먹는 인간말종이 있다는 점에 경종을 울려주는 말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영어를 잘 못한다거나 정보가 부족한 한국인이 취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해서 안타깝기도 한 말이었다. 특히 생각이 겉으로 그대로 드러나있는 사람 같은 경우에는 겉은 고사하고 속까지 발라먹기에 안성맞춤이기에 더 주의가 필요했다. 그런데 시드니에서 경험을 떠올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거 같았다. '운이 정말 좋았지!'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첫 인스펙션에서 집을 볼 때 고려해야 할 점을 알려준 청년도 그랬고, 집구경 간 남에게 크리스마스 파티 초대에 일자리 알선까지 해준 부부도 물론, 백패커에서 마지막을 함께 해준 한국 가족도 앞의 의심을 거두기에는 충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시험의 순간이 찾아왔다. 마치 처음 가본 지역의 택시기사님과 쏟아지는 대화에서 진의는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처럼, 픽업 기사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거둬들였던 의심병이 살짝 다시 돋았다.
픽업: 밤에 이렇게 도착하신 분은 오랜만인 거 같네요
나: 아 네, 표를 급하게 끊느라 이 시간이 젤 낫더라고요 하하
픽업: 혹시 그럼 브리즈번은 어떻게 오신 거예요?
나: 제가 워홀로 왔는데, 여기 닭공장이 유명한 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들어보셨나요?
픽업: 아.. 거기 말씀하시나 보네.. 며칠 전에도 거기 얘기하셨던 분 계시긴 했는데 잘 모르겠네요
나: 아 네...
잠깐의 정적 이후, 상대편에서 또 말이 넘어왔다.
픽업: 혹시 소고기 공장이나 쉐드장 같은 건 들어보셨어요?
나: 아니요? 전~혀 못 들어봤는데요
픽업: 근데 가셨다가 안되시면 어떡하시려고요..?
나: (...)
픽업: 제가 이거 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태워주다 보니까 다른 곳도 가시길래 여쭤봤어요. '킬코이'나 '부나'는 들어보셨어요?
나: 어... 그것도 처음 듣는데요 ㅎㅎ.
픽업: 그쪽으로도 사람들 많이 가더라고요. 혹시나 일단 알고 계시면 다음에 또 알아볼 수 있으니깐요.
나: ㅎㅎ모르는 걸 알게 됐네요. 나중에 찾아볼게요.
사실 별말씀은 없었다. 정보를 주시는 거 같긴 한데, 스스로 가진 정보가 없으니 곧장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고, 그 덕에 의심병이 살짝 돋았나 보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장 거기로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연락을 달라했어도 내가 안 하면 그만인데,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하루종일 시달린 피로에 더 예민해졌던 모양이다.
대화 중에 놀랐던 부분은 목표하는 닭공장이 안 됐을 경우 어떻게 할지 전혀 생각이 없었던 스스로에 놀랐다. 지치고 힘들 땐 '안되면 돌아가면(귀국) 그만이지'라는 생각이었는데, 여기까지 와놓고 또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양심이 좀 찔리기도 했다. 밖을 보니 세상은 온통 까맣고, 일자리도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수영장 딸린 아파트라니.. 괜한 기대감에 앞서 들었던 걱정도 잠시 잊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