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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e Mar 06. 2024

로마 스트릿, 내로남불 호주 살 청년

16.12.28.


출세한 촌사람


숙소 위치는 Roma Street Parkland. 입구 쪽 분수대와 반대편에 펼쳐진 초록빛 공원, 이국적인 모습의 아파트 모습에 내심 놀랐다가 이곳에 살게 되는 건가 하는 기대감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도착하기 전에만 해도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만 보고서 덜컥 예약을 잡은 게 잘한 일인가 걱정이 되었는데, 백패커 입구에서 들려오던 요란한 음악 소리도 없는 이곳은 아무튼 그곳보다는 나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멀뚱멀뚱하다가 전화를 걸어 도착했다고 알리니 어떤 아주머니께서 오시더니 인사와 함께 안으로 안내해 주셨다. 들어가는 길도 신기하고 만족스러웠는데, 가는 길목 왼쪽에는 수영장이 보였고 안쪽에는 헬스장까지 있다고 하셨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토큰 같은 걸 톡 대니 열렸고, 여기서는 필수라며 간단한 사용법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곧 도착한 집, 고층에서 살았다면 이렇겠구나를 실현해 주는 높이, 여태까지 살아본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은 평수, 바깥으로 보이는 멋진 야경까지, 갑작스러운 브리즈번행이었지만 이 집만큼은 앞으로 뭔가 잘 풀릴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대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복선이 되었다.



초면에 이런 말씀드리기.. (어려우면 하지 마!)


아주머니께서는 방소개를 해주신다며 불이 꺼진 방을 살짝 보여주셨다. 동시에 한밤중에 일 나가는 친구라서 자고 있을 거고 소곤거리시며 설명해 주셨는데 알겠다며 나가려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서 마른 체격의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어두울 땐 몰랐는데 불빛 아래에 들어서니 마르고 다부진 체격에 키는 보통보다 작아 보였고, 살은 살짝 타서 옅은 밤색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는 '나는 호주 살 사람인데~!' 하는 추임새가 특징적이었고, 말할 때마다 '하-'라든가 '휴-'하고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강렬했던 첫인상은 말끝마다 "초면에 이런 말씀드려서.." 하는 모습이었다.


이유인즉 자기는 곧 밤 열한 시-열두 시쯤 일을 나가는데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더 자야 하니 그 시간까지 제발 조용히 있어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이었다. 상세조항도 읊어줬는데 '1. 문 살살 닫기 2. 짐 풀 때 조용히 3. 대화는 밖에서'정도였는데, 당장 씻고 쉬고 싶은 내게 방 맞은편 미닫이 문으로 나뉜 화장실에서는 어떻게 조용히 써야 하나 고민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뭐가 그렇게 못 미더운지 한 번 말하면 될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는 행태를 보고 있으니 속이 답답했다. 여름날 무거운 짐을 들고 공항 두 곳을 왔다 갔다 하고 나니 티셔츠는 이미 찐득찐득해진 지 오래에 별 시답잖은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별 것 아닌 말에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초면에 죄송하면 말을 말든지, 아니면 바로 필요한 걸 제대로 말하든지!

지 할 말 실 컷 다 해놓고 혼자 떳떳한 척 고상한 척 하기는!!!'


엄석대가 따로 없을 텃새 앞에 속으로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어차피 정착할 곳 알아보기 전에 잠시 들르는 곳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열이 뻗쳐도 어 어쩔 수 없는 게 이미 일주일치 방세와 디파짓을 아주머니께 드린 상황이라 그 돈을 다시 가져오는 게 아니고서는 내 마음을 고쳐 먹는 게 훨씬 더 쉬워 보였다. 긴 설명이 끝나고 청년은 다시 방으로 향했고, 침상을 눕기 전에 나를 부르더니 위를 가리키며 이층 침대가 내가 쓸 곳이라며 '올라갈 때 조용히..'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로마 스트릿, 내로남불


예정에 없던 시집살이 앞에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그 말도 떠올랐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숙소 위치가 로마 스트릿(Roma street)이라 그런 헛생각도 들었다. 각자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나도 최대한 협조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샤워는 어쩔 수 없기에 눈치는 보였지만 최대한 짧게 씻고 나서 노트북만 꺼내서 거실에 나가있기로 했다. 바로 쉬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차피 다른 숙소도 알아봐야 했고, 이력서도 조금 더 손볼 수 있는 전화위복이란 생각을 가지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불 꺼진 거실, 부엌에 켜둔 무드등과 노트북 불빛을 벗 삼아 숙소를 찾아보고 있는데 바깥 먼 곳에서 덜그럭-덜그럭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익숙하다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기차가 지날 때마다 들리던 선로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고향 집에도 근처에 기찻길이 있어서 기차가 지날 때마다 요란하게 들렸던 기억 덕분에 단번에 그 소리가 그 소리겠거니 생각할 수 있었다. 먼 타국에서 고향 생각도 살짝 났다가 꼼꼼하게 숙소 정보를 찾고 또 찾기를 반복했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열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방 쪽 이중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까 그 청년이 거실로 나왔다. 가볍게 목례나 할까 싶었는데 거긴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내 일이나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부엌에서 큰 목소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요~! 어디십니까? 어어, 식사는 했고? 어어, 그럼 우리 집에서 라면이나 끓여 먹고 갑시다!"


이건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가?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조용히 해달라던 아까 그 청년이 맞았다. 아주 신난 모습으로 선반에서는 라면을, 냉장고에서는 야채와 만두, 햄과 같이 갖가지 재료를 꺼내더니 식탁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구 쪽에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청년보다 몇 살 더 어려 보이는 한 청년이 부리나케 쫓아와 인사를 나누더니 이야기가 시작됐다. 곧 물은 끓고 온 거실은 라면수프 냄새로 가득 찼고, 두 청년은 만두햄라면에 대한 찬양과 오늘 청고할 구역과 최근 있었던 일을 주고받고 있었다. 분명 이어폰을 끼고 있는데도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 데시벨, 이것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따지자니 속 좁아 보이고, 가만히 있자니 답답하고, 앞서 들었던 주의사항은 대체 무엇이었나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화가 났던 건 저녁으로 치기도 애매한 기내식 땅콩 한 봉지와 와인 한 잔이 전부였던 내 앞에서 지들끼리 좋다고 처먹는(?) 라면 덕분에 서러움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한테 식사여부까지 물어봐줬으면 하는 게 과욕이란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지나가는 말이라도 '식사는 하셨어요?'하고 물어봐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들었다. 잔소리 보다도 더 화가 났던 그 라면, 아마도 한 젓가락이라도 원했던 내 속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라면 폭풍이 할퀴고 간 폐허에는 설움만이 우두커니 남겨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배고픔은 수그러들었고, 그제야 말라깽이 비매너남의 행태가 더 꼴사랍게 느껴졌다. 그렇게 신신당부하던 문살살 닫기는 거실에 나올 때 쿵쾅 소리로 대변했고, 열두 시가 다 되어가는 거실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모습은 대체 무얼 그렇게 조용해달라고 하던 것이었을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저 인간이 퇴근하고 나서 아무렇게나 할 행태를 떠올리니 저런 인간과 어떻게 같이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에 한 마디를 해보거나 맞서 싸우지 못한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탓이 탓을 부르더니 호주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이니 결국 호주행이 잘못됐다는 이상한 생각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잠은 일찍이 깼고, 숙소 찾는 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어쩔 수 없는 것에 매달려있는 내 모습이 답답해서 잠시 밖에 좀 나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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