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29.
새벽 다섯 시, 키필코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동했는지 저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짐은 제대로 푼 게 없으니 그대로 가져 가지만 하면 됐으니 나갈 채비는 끝났다. 이제 좀 안 옮겨도 되지 않을까 했던 그 많은 짐을 다시 온몸에 매달고 양손으로는 캐리어를 끌고 밀며 아파트 밖으로 나섰다.
'덜그럭 덜그럭-'
짐을 붙잡느라 손이 부족했지만 가는 길을 모르니 어떻게든 폰을 꺼내서 구글맵으로 역으로 가는 길을 찾아봤다. 한밤중에 차로 올 때는 몰랐는데 숙소가 꽤 고지에 동떨어진 곳에 있는 모양인지, 창문으로 보이던 선로와 역사까지는 생각보다 많이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걷다가 공원도 지나고, 내리막도 지나며 구글맵이 가르쳐준 대로 따라가고 있었는데 왠지 돌아가는 것 같아서 지도상에 지름길로 보이는 곳으로 과감하게 방향을 틀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르쳐준 대로 갔으면 본전은 챙겼을 텐데... 가다 보니 제대로 된 길이 막혀있던 게 아닌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느냐 위험해 보이지만 조금 더 빨리 가느냐 갈림길에서 더 늦을 순 없단 생각에 온 짐을 떠안고 언덕 비탈로 내려가기로 했다.
'악!'
길이 아닌 길을 가는 게 화근이었다.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언덕 비탈을 가다가 살짝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본의 아니게 호주 넝쿨과 흙먼지로 샤워를 하고 말았다. 선택과 행동은 빠를수록 좋다는 말도 들어 봤지만, 그렇다고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까진 덜어주진 않는다는 걸 넘어지면서 온 짐을 받쳐내며 느낄 수 있었다.
아직 해가 조금 뜬 새벽 시간, 그렇게 덥다고는 못 느꼈는데 이미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벌써부터 피곤함을 느꼈다. 게다가 길은 또 왜 이리 비슷해 보이는지 영 모르겠고, 어디 물어보고 싶어도 가뜩이나 인적 드문 호주에서 시간까지 이르다 보니 더 보이지 않아서 답답함이 배가 됐다. 분명 이 길 같다가도 아리송한 느낌을 받으며 다시 돌아가야 하나 할 찰나에 조깅하고 있는 주민을 마주치게 되었다. 민망함이고 뭐고 떠오를 겨를도 없이 큼지막한 짐을 끌면서 자본주의 미소와 함께 "Excuse me!"를 외쳤다.
"Excuse me! I'm traveler, can I ask you something? I'm looking for a train station. How can I get to the station?"
-라고 물어봤으면 좋았으련만... 실제로는 'Roma street station!!'만 주야장천 외쳐서 그 주민분도 적잖이 놀랐으리란 생각이 든다. 갑작스러운 외침 같은 질문에도 버스로 갈 것인지, 트레인을 탈 건지 물어보셨던 거 같고, 역사로 가는 길과 이어진 에스컬레이터 위치를 알려주셨다. 아뿔싸, 아까 그냥 쉼터 벤치 정도로 생각했던 구조물이 에스컬레이터로 이어지는 통로였다니... 이걸 알아채지 못했으니 길을 돌고 돈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나름 수년간 서울, 경기권 생활을 해오며 나름 길은 잘 찾는다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단숨에 길치가 되어버린 게 참 신기하면서도 민망하기도 했다.
'아 맞다, 나 (교통) 카드 없었지..?'
겨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오니 그제야 인적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따라 플랫폼으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에스컬레이터로 또 옮겨 탔다. 이동하면서 문득 시드니에서 썼던 오팔카드는 있는데 브리즈번에서 쓸 카드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호주는 도시마다 쓰는 교통카드가 다르다는 게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하기사 어젯밤에 도착하고 나서 Train 역사는 이번이 처음이니 모르는 게 당연했지만, 한 가지 더 문제가 있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지하상가에 오픈한 shop이 없는 것이다. 이를 어떡하나 싶다가 영어 울렁증이 진동했지만 어쨌든 살기 위해서 유니폼을 입은 역무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Excuse me, I.. don't have a card,
but I go to indooroopily, um.. uh.. shops are closed, uh.."
겨우 말문은 뗐지만 횡설수설하며 나조차도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역무원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는 갸우뚱, 입술은 다문체 두 눈은 치켜보며 손가락으로 반대편 너머를 가리키더니 이내 고개를 휙 돌려 제 할 일 하러 돌아갔다. 속으로 '뭐지? 가라는 건가?' 하는 생각에 가리킨 쪽으로 조금씩 걸어갔다.
문제는 당장 보이는 카드 개찰구, 카드 없이 가란 건지 영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이 가는데 죄지은 것도 아닌데 자꾸 마음이 콩알만 해졌다. 개찰구 옆엔 다른 역무원 한 분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카드를 찍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도착한 개찰구 앞,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고개를 돌려 'Ex..'를 뱉으려는 순간, 역무원이 지나가라며 손짓을 해줬다. 멀뚱멀뚱 쳐다보며 가도 되냐며 안쪽을 가리키며 손짓하니 그쪽도 손짓하며 'of course'하는 게 느껴졌다. 지나가면서도 맞는가 얼떨떨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그 역무원이 무전을 하며 지지직 소리와 함께 뭐라 쏼라쏼라 하는 게 보였다. 입구에 역무원이 불친절하다 생가했는데 이걸 보니 또 괜스레 오해한 거 같아 머쓱하여 어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금 더 걸어가니 드디어 터미널 차표 끊는 곳처럼 생긴 간이 사무소에 도착했고 'Go card(브리즈번의 교통카드)'를 살 수 있었다. 얼마 충전할 건지 물어보기에 대충 말하고 돈 내고 샀는데 잔돈이 생각한 것보다 더 적게 받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시드니 Opal card도 그랬는지 가물가물한데, 여기서는 카드 디파짓(deposi)이 더 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가뿐한 마음으로 개찰구 앞에 선 나, 본의 아니게 치른 브리즈번 첫 Train 신고식에 진땀을 뻘뻘 흘렸지만 이제는 눈치 보는 눈초리가 아닌 가벼운 눈인사를 날리며 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했다. 역사가 큰 것인지 또 여러 갈림길에 어디다가 물어봐야 하나 싶었지만, 용기도 안 나고 다들 바빠 보여서 스마트폰 속 소울 메이트 구글맵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안내된 플랫폼을 확인하고 바로 이동했다.
신기한 브리즈번 Train
아직 안심하기는 이른 Train 탑승, 플랫폼 위치를 착각했다간 다른 지역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플랫폼 위치를 외우고 또 방향을 살폈다. 목적지는 Indooroopily, 이제는 방향만 잘 정하면 된다는 생각에 Central과 반대방향이란 것만 되뇌며 기차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Train이 도착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에 당황하게 되었다.
분명 시드니에서는 Train 문이 서울 지하철처럼 '척!'하고 열렸던 거 같은데…, 아니 여기 브리즈번 열차는 버튼을 눌러야 열리는 게 아닌가? 당황해서 열차 하나는 보내고, 다음 열차에서 버튼을 눌렀더니 '치익-척!'하고 문이 열렸다. 호주 3대 도시라더니… 열차 문이 반자동시스템이라니…, 뭔가 혼란스러우면서도 이렇게까지 절약정신을 발휘하는 건가 싶어 대단하단 생각도 들었다. 감탄도 잠시, 문이 열린 사이에 캐리어며 온몸에 멘 짐을 옮겨다 실었다. 어차피 내 짐은 오롯이 내가 처리해야 할 뿐이니 도움을 바라는 것보다 많은 짐 때문에 눈총 받을까 약간 민망한 마음이 들긴 했다. 어쨌든 열차에 올랐으니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곧 간다, Indooroop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