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계부를 쓰기 시작할 때, 마음속 가장 큰 짐은 여기저기에서 마이너스된 것을 한 곳으로 몰아놓은 카드값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질렀던 강의 쇼핑에다 카드 명세서를 가계부로 퉁쳐버린 지난날의 잘못된 선택이 부른 참사다. 뭐가 그리 불안하고, 뭐가 그리 귀찮았을까.
카드값이 처음부터 300만 원이었던 건 아니다. 식비 만으로는 소비 통제가 되지 않아서 카드값이 조금씩 늘었다 줄었다 하길 반복했다. 덜컥 겁이 났던 건 주식의 조정구간처럼 살랑살랑 흔들다가 500만 원 찍고, 더 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통제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빚도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할 필요 없다 싶었지만 아직도 나에게 빚을 통제할 능력이 남았는지는 더 이상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지독한 카드값.
1000만 원도 아니고 고작 300 만원인 주제에 왜 안 줄어드는 건가!
소비 단식의 이유가 카드값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가장 큰 이유이기는 했으니 허리띠를 졸라매고 줄여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지난 9개월 동안 눈만 뜨면 소비 결정의 기로에서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말은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더 벌고,
아끼고,
모으고.
소비를 줄이는 것만으로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한 건 5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싱글이 아니다 보니 온 가족의 소비를 모두 통제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기도 했고, 돌아서면 이런 저런 기념일들이 다가와서 지독한 300만 원의 탈출은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더 벌어야만 했다. 결국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봤는데 다행히 계약이 잘 된 덕분에 순조롭게 수입을 늘릴 수 있게 됐다.
'심리계좌'
마음속에는 돈에 대한 심리적 회계 장부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더 벌어도 지키고, 모으는 건 힘들다고 한다. 지난날 내가 더 벌어도 지키고 모으지 못했던 것 역시 바로 마음속 회계장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다음 달 강의료 입금액을 생각하면 희망사항이던 지출리스트는 어느새 필수 항목이 되어있곤 했다.
'날씨가 많이 더워졌으니까 강의 나갈 때 입을 슬랙스 하나는 더 있어야지'
'매일 아침 과일식 한지 200일이 넘었으니까 이제 낡은 믹서기 버리고 새거 하나 사야 되겠다'
등등..
강의료가 들어오면 바로 카드값을 다 상환했지만 반쪽짜리 체크카드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집은 상환과 동시에 다음 달 카드값이 쌓이고 있었다. 물론 더 이상 많이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에 신학기도 있었고, 부모님 생신과 결혼기념일 등 가족 행사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비정기 지출은 카드로 결제가 되었다.
한 10년 전인가. 그때도 카드값 때문에 힘들 때가 있었는데 수입이 늘어나면 바짝 줄여서 현금베이스로 갈아타겠노라 결심했었지만, 안타깝게도 한 달도 성공하지 못하고 쫓기듯 신용카드 생활을 이어나갔다. 신용카드 결제일 변경만 간신히 한 후로 다시는 크게 현금으로 피봇을 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기필코, 꼭 신용카드를 청산하고 말겠다는 마음이었다.
비고정 지출에서 식비만큼은 예산에서 사용하는 습관을 들이고 가족들도 식단이나 외식비 지출 상한선에 많이 익숙해졌다. 한 달 전부터는 주간 결산도 하기 시작했다. 물론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이유는 비정기 지출도 점차 예산을 세워서 지출하는 시도를 해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야 내 마음속 심리계좌에서 함부로 돈을 인출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한 번씩 뭐가 자꾸 사고 싶어 졌다. 머릿속에 이미 '나 다음 달에 조금 여유 있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는지 자꾸 쿠팡에 들어가고, 어느샌가 택배가 왔다. 이럴 땐 악마의 로켓배송이다. 그리고 가계부를 써보면 정말 5만 원은 우습게 사라진 걸 발견하곤 한다.
주간결산에 분류를 제대로 한 건지 도통 알 수 없지만 우선 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 하면서 쓰고 있는데 뒤죽박죽이긴 해도 꽤 효과가 있다. 무지출 데이는 좀처럼 나오지 않지만 적어도 힘들게 번 한 달 치 강의료가 심리계좌에서 인출되지 않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곤 한다. 그 덕분에 큰 지출을 피해 이번달 모든 카드값을 선결제하고 남은 돈도 지켰다.(그렇지 않았으면 분명 비싼 믹서기를 결제했을 지 모른다)
물론 아직 5월이 절반이나 남았고, 20일 이후에 자동출금 될 항목들이 적지 않아서 남은 돈으로 지출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지 짐작하기 힘들지만 다음 달 이월 될 카드값이 1원도 남지 않았다는 것은 그동안 반 포기상태로 신용카드를 꺼내 들던 나에게 가능성의 희망을 보게 해 준다.
하나라도 제대로 지켜내려고 매일같이 애를 썼지만 소비에 있어 뭐 하나 쉬운 결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애씀이 모여 마이너스에서 0원까지 만들고나니 아무것도 없는 통장인데도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빚을 정리하니 빛이 보인다. 다음 달은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지독한 카드 빚을 다시 만드는 일이 없길. 0원을 만드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음을 잊지않고, 돈을 지키는 연습을 꾸준히 이어나가 보자!
*마이너스 플러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