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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이 Jun 10. 2024

하지 않을 용기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플래너를 쓰지 않는다. 분명 효율성을 높여주는 도구일 텐데 언제부터인지 가느다란 실이 줄지어 서있는 것 같은 플래너를 펼쳐두고 보면 마음이 여기저기 쑤셨다. 칸이 비어 있으면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아서, 칸이 빼곡하면 자꾸만 숨이 차오르는 것 같아서.



한 때는 일도 잘하고, 좋은 엄마도 되고 싶고, 그것 이외에 다른 것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마음이 바빴다. 그러다가 속도가 조금 느려지는 때가 오면 불안했다. 온전히 쉬지 못했고, 오랜 시간 저전력 모드로 일상을 버틴 날들이 많았다. '만능인'이 되고 싶어서 점차 내 안의 내가 옅어지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 내 옆에 붙은 온전치 못한 수식어만 많아진 걸 알게 된 어느 날, 나에게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일주일, 한 달, 6개월, 1년을 계획하다가 그저 '오늘'을 산다. 매일 아침 하루의 원씽을 떠올린다. 그것 이외에 다른 일들을 투두리스트에 올리고 싶지 않기도 하고, 저전력 모드로 오랜 기간 달린 나에게 더 많은 투두를 해낼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으니까.



예전에는 몰랐다. 무언가 하지 않는 일이 이토록 힘든 것인지. 시간을 비우는 일도 '물건'을 비우는 일처럼 한 번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조금씩, 조금씩. 시간을 차지했던 일들을 아주 조금씩 덜어내다 보면 신기하게도 비워진 만큼 '풍요'를 느낀다. 



여전히 해야 할 '것' 같은 일들이 불쑥 나타나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쓸려나가기도 하지만, 물끄러미 그런 마음을 바라보며 하지 않을 용기를 내어 또 아주 조금 덜어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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