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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경지 Apr 25. 2024

빛살을 가르고 눈에 닿은 색의 조각을 맞추는

글_구유빈 작가_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오픈스튜디오 비평교류 프로젝트

낮에 창문을 통해 보았던 풍경을 기억하려 하면 자동 환등기에 꽂힌 슬라이드 필름이 흰 벽에 투사되듯 선명하게 떠올려지지 않는다. 꽤 왁자지껄했던 소리, 짙어진 녹색 잎으로 뒤덮인 나무 등과 같이 각인된 감각만이 맴돈다. 애써서 기억하고자 했던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해 놓아도 그 안을 채웠던 감정과 대화는 시간에 휩쓸려서 희미하게만 남아있다. 일상에서 수집하는 사진 이미지는 특정 순간의 감정, 감각 등을 모두 담아내기 충분하지 않지만, 구유빈은 그 순간에 가닿기 위해서 사진 이미지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재현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을 회화 작업을 통해 계속해서 되짚어간다.      


작가는 디지털 스크린을 통해 사진을 보며 작업하는데, 스크린에서만 감지할 수 있는 고채도의 색채와 빛을, 장면을 수집할 때 느꼈던 감각과 접목하여 풀어낸다. 이를 위해 캔버스에 작업을 시작하기 전 노출값과 채도를 조정하여 작가가 경험했던 사진 속 순간을 구현한 에스키스(esquisse)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사진 이미지를 통해서 작업에 대한 구상을 시작하는 것은 눈으로 마주한 순간을 사진을 참고하여 완벽히 재현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서가 아니다. 작가의 눈에 닿은 그 순간을 복기하며 감정, 분위기 등을 빛과 색을 조절해 가면서 담아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Pink Sunset〉(2023)〈Summer time〉(2023)에서는 일상에서 마주한 순간이 주는 인상에 주목한다. 작가는 빛의 변화를 민감하게 좇으며 화면을 구성해 나가는데, 이는 꽃과 잎 사이로 혹은 유리컵과 창문을 통과하며 화면을 채우고 있는 빛을 묘사하는 것이다. 비가시적인 요소인 빛을 캔버스에 담아내기 위해서 작가는 주된 색채를 먼저 얹고 블렌딩 (Blending) 기법을 기반으로 붓질을 매끈하게 하여 나뭇잎, 꽃, 테이블 위의 컵과 같은 물건들에 빛을 침투시킨다. 특히, 〈Pink Sunset〉은 화면을 가르는 빗살이 눈이 부셔서 어렴풋이 보았던 풍경처럼 마치 일부분 블러(blur) 처리를 한 듯 묘사되었다. 이는 불완전한 기억을 조금씩 회상해 나가는 작가의 작업 과정과 닮아있으며, 작업의 표제로 '일몰', '여름' 등 빛을 머금고 있는 단어가 붙여져 그 시기 개개인의 감정과 경험을 함께 불러일으킨다.     


〈틈 사이로〉(2023)에서부터는 화면을 장악했던 빛이 조금씩 걷히며 채도 높은 색상이 화면에 등장한다. 불규칙적이지만 모두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넝쿨과 같은 식물은 캔버스 한쪽에 여러 겹으로 쌓였었던 물감의 흔적마저 덮어버린다. 이전 작업에서 매끄러운 표면을 위해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 틈으로 보이는 물감의 흔적이 공간감을 만들어서 '저 잎에 가려진 건 붉은색 깃털을 가진 새가 아닐까'하는 상상을 자아낸다.     


이번 오픈 스튜디오에서 중점적으로 선보이는 〈Magenta in the café〉(2023), 〈Green Market〉(2024) 그리고 〈Blue to Coral〉(2024)은 고채도의 색상을 더욱 과감히 사용한다. 에스키스 단계에서 작가가 경험한 감각에 따라 전반적으로 채도가 높아진 색상은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어긋나기 쉽지만 작가는 한 조각씩 색상의 조응을 살피며 붓 터치를 진행한다. 또한, 이미 에스키스 단계에서 원본 이미지의 색상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작가가 참고하는 것은 자신이 화면에 채운 색의 구성과 붓 터치 그리고 기억만을 의지한다. 화면을 구성하는 형태들도 〈Magenta in the café〉의 창밖 풍경과 구 모양의 조명에 맺힌 상들처럼 굴절되고 투영됨에 따라 본래 형태에서 벗어나 서로 어슷하게 맞물려있다. 특히 〈Green Market〉의 좌우측 가장자리 부근은 쉽사리 물건을 적재해둔 팬트리로 추측할 수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선반 위의 물건들은 세밀하게 묘사되지 않고 도형 혹은 붓 터치로 묘사되어 있다.      


가장 최근 작업인 〈Blue to Coral〉은 작가의 이전 작업의 과정이 확연히 드러남과 동시에 향후 이어질 작업을 짐작하게 한다. 빛과 색이 모두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Green Market〉의 화면 왼편에서 비치는 듯한 빛을 일부 표현했던 것에 비해 〈Blue to Coral〉을 보면 바닥, 철제 선반으로 추측되는 구조물,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식물에 빛이 비침으로써 변하는 색을 적극적으로 묘사했다. 앞선 작업에서 빛을 묘사할 때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매끄러운 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다면 색을 과감히 사용함으로써 '푸른색에서 산호색으로' 변하는 색의 구성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작가는 꽤 오랜 시간 화면에서 자신의 기억과 감각을 되짚는다. 잘 들어맞지 않는 조각이 생기면 문장을 새롭게 쓰듯이 다시 사포질하여 다른 조각을 만든다. 이러한 빛살을 가르고 눈에 닿은 색의 조각을 맞추는 구유빈의 작업 과정은 기억, 감각, 경험 등이 중첩되어 어느 순간 작가를 그리고 관객을 의미의 한가운데로 가져다 둘 것이다. 그러니 기대하고 자신이 만든 이전 조각을 함께 바라보자. 그 순간에 가닿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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