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_프로젝트 전시공간 여튼952/2021.11.23. - 12.1.
2021년 유독 짧았던 가을은 생산성을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시작을 위해 차별성을 이야기해야 했고, 타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전시를 비유할만한 표현으로 ‘시제품’이라는 단어를 입으로 수십번 내뱉었다.1) 비생산적 활동으로 여겨지는 예술작업을 선보이기 위해서 우리의 생산성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렇게 전시공간 ‘여튼952’는 생산성이 증명되어 흥선로 95-2에 안착했고,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고》 전시를 선보였다.
전시 동안 관람객들은 전시공간으로 몸바꿈 한 빈집에서 예술 작품을 마주하는 새로운 관람 경험에 흥미로워하면서도, 전시공간의 필요성과 예술의 유효성에 대해서 질문했다. 경제적 가치를 내는 일이라면 답은 하나로 귀결되지만, 수의 논리에서 벗어난 일을 도모했기에 창작을 위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다. 이후 공간의 지속성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간에 우리는 다시 스스로 되물었다.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경제적 수입원을 꾸준히 마련하면서까지 예술과 공간의 필요성을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각자의 힘을 아낌없이 쏟은 시간과 공간이 연결해준 사람과의 대화는 다음을 상상하게 했다.
그렇게 여튼952의 두 번째 기획전시인 《신음과 비명 너머에서 가다듬어,》는 또 한 번 비생산적인 활동의 결과물들로 여튼952를 채운다. 첫 기획전시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고》가 여튼952라는 공간에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는 작품을 통해 전달하는 작가의 말하기에 주목하고 관람객에게 간접적으로 말을 건네고자 한다. 강연, 연설 등과 같이 교조적인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이 아니다. 예술의 파레시아적 실천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발굴한 개념인 파레시아(παρρησὶα, 진실 말하기)는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유래하고 발전한 발화 기술로서, 자기가 진실하다고 믿는 바를 관념의 차원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현실 속에서 구체화해 드러내는 실천이다.2) 이러한 실천은 예속적으로 작동하는 기존 가치들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것이고, 그전까지 문제시된 적 없는 삶의 방식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파레시아, 즉 진실 말하기와 김민지, 락윤, 장은준 작가의 작품의 미학적 실천이 공유하는 지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각과 현상을 집요하게 파고들거나, 주류에서 밀려난 상징들에 목소리를 부여하기도 하고, 마주하지 않았던 것들을 대면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작가들은 기존의 체계와 사고의 틈을 파고 드는 방식에 있어서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하며, 이들이 건넨 질문들은 각각의 작품 안에서 관람객과 만난다.
김민지는 시공간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각과 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표현해왔다.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토대로 작업을 이끌어왔던 김민지는 최근 문학, 연극, 사운드 등 여러 장르와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OO을 찾아서>는 제목에 명시된 바와 같이 ‘OO’을 찾으려는 8명의 사람들의 대화로 구성된 작업이다. 전시장 창문을 가리는 커튼과 벽면에 투사된 정적인 상은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목소리에 이끌려 들어온 관람객은 방에 놓인 벤치에 걸터앉아 자연스럽게 창을 바라보며 OO이 무엇인지 알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들려오는 인물들의 대화를 아무리 귀 기울여 봐도 OO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고 더욱이 모호해질 뿐이다. 그렇게 그저 끊임없이 반복되는 추적 속에 함께 내던져진다. 그들이 뒤쫓는 OO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라진 것인지, 심지어는 이들이 왜 OO을 찾으려 하는지조차 알아내기 어렵다. 추적하는 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여 대화를 쫓아가던 관람객은 하나의 대상으로 특정되길 거부하는 OO을 직면하면서 어느 순간 추적을 당하는 자와 지위가 역전된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본 작업은 언어의 기능을 상실해버린 할아버지와 그런 그를 어떻게든 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족의 모습, 그리고 인근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지리산 반달곰을 통제하기 위해 풀어두고 감시하길 되풀이하는 인간의 모습을 같은 선상에 놓고 시작되었다. 그러면 OO는 할아버지와 반달곰 중 하나일까. 작업의 시작점은 OO를 특정 대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벤치에 앉은 관람객의 눈과 귀를 자극하여 언어의 기능을 잃거나 없는 관찰대상자, 보호라는 명목 아래에 감시하는 관찰자 그리고 이를 관망하는 우리를 보게 만든다. 결국, 작가는 사라진 OO을 관람객과 함께 더듬어보고자 한다.
락윤은 세상의 주류의 언어를 활용하기보단 주류에서 밀려난 상징들에 주목하는 작업을 해왔다. 작가에게 공사 현장, 고물상 등에 방치되고 버려진 사물은 마치 거대 도시에 밀려나 오갈 데 없어진 사람으로 다가왔다. 역할과 기능을 잃은 사물들을 목격한 작가는 이들을 공업 물질과 결합하여 사물은 물질로 환원되려는 특징을, 물질은 사물성을 모색하려는 일련의 교차를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물의 기능과 재료의 물성이 교묘히 결합한 작업은 구축된 형태의 목적성을 끊임없이 재맥락화되는 임의의 상태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지나간 한숨을 위한 기념비>,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 <춤추는 4개의 파편들>, <아서는 움직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지>는 기능을 잃는 사물들을 재구축한다는 점에서 이전 작업들은 연결되지만, 우레탄폼, 레진 등과 같은 재료의 단점을 통제하려 했던 것과 달리 ‘우연성’을 기꺼이 수용해 재료 자체로 느껴지는 ‘텍스처’를 보여주는 점에 있어서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아서는 움직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일상의 균열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통제를 위한 텍스트와 이미지를 드러낸다. 작품을 구성하는 트래픽 콘은 교통과 주차공간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성을 갖고 있지만 적힌 ‘주차금지’는 예상치 않게 생긴 장소가 점유되는 상황을 방지한다. 작가는 이에 주목하여 법과 규율이 분명 존재하지만, 문명사회에서 간과하고 또한 어느 정도 용인해 주고 있는 아노미 상태가 드러나는 모호한 공간을 또 다른 텍스처로 받아들인다. 결국, 락윤의 작업에서 여러 전략으로 재구성된 조각들은 공간, 각목 구조물, 부산물이 작품을 함께 이루고, 각기 다른 의미의 층위가 존재하기에, 공간과 작품을 온전히 살펴본 관람객은 작가가 치밀하게 의도한 장치들을 다각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장은준은 삶의 반경에서 마주하지 않았던 녹슬고 깨진 상태의 규격의 재료들에서 ‘기준대로 살아지지 않는 수많은 우리들’을 마주했으며, 이를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다른 시공간에 구현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작가는 깨어진 유리 조각이나 녹슨 철과 같이 평상시 마주하지 않았던 것들을 대면하는 상태에서 느껴지는 상황을 관람객이 직접적으로 만나도록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녹녹(綠-knock), 똑딱>과 <녹녹(綠-knock), 똑똑>을 통해 보여주듯이 다양한 흐름 속에서 잠시 멈추게 되는 장치와 상황을 만들고, 이 과정에서 평소에 미처 바라보지 않았던 것들이 잠시나마 보일 수도 있는 상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관람객은 흘러가는 시간이 치환된 듯한 메트로놈 소리, 자신만의 호흡으로 떨어지는 물 한 방울, 흩뿌려진 모래, 이것들이 서로 만나며 만들어내는 관계와 순환의 흐름에 몰두하다 보면, 미미한 소리와 움직임에 자신의 감각을 내어주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눈의 형태처럼 보이는 <녹녹(綠-knock),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는 더 나아가 작품 앞에 대상의 모습이 반사되는 표면이 막다른 벽에 평행하게 놓여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관람객을 작품의 관계망 안에 끌어당김으로써, 마주하지 않았던 낯선 물질감을 만나게 하고 관람객은 공간을 채우는 향과 바닥에 흩뿌려진 검은 모래들과 어울려진 자신을 조우한다.
1) 기존에 의정부에서 전시가 이뤄졌던 공간과는 다른 성격의 전시와 공간을 제시하기 위해서 10월 30, 31일 이틀 동안 오픈 스튜디오 개최했다. 우리는 관람객에게 오픈 스튜디오를 여튼952에서 선보여질 전시의 프리뷰로 이야기하는 동시에 이해를 돕기 위해 ‘시제품’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2) “파레시아에서 화자는 자신의 자유를 이용하고 설득 대신 솔직함을, 거짓이나 침묵 대신 진실을, 생명과 안전 대신 죽음의 위험을, 아첨 대신 비판을, 사리사욕과 도덕적 무관심 대신 도덕적 의무를 선택한다.” Michel Foucault, Fearless Speech, ed. Joseph Pearson (Los Angeles: Semiotext(e) 2001), pp. 19-20, 최종철, 「포스트 진실 시대의 예술 동시대 예술의 이율배반적 조건들」, 『미학예술학연구』 63집(2021), p. 206 각주 29번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