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유로

Weender Park 노인들

by Lilla



"아~~ 첫눈이다!!"


오늘따라 회색 롱코트가 유독 처량하게 느껴진다. 왜 하필 이걸 입었을까?

좀 더 단정해 보이려고? 가지고 있는 옷 중 그나마 제일 나아 보여서?

독일에 오기 전, 언니와 안양 지하상가를 돌아다니다가 고르고 또 골라 결국 집어 든 7만 원짜리 롱코트였다. 살 때는 큼지막한 모자가 세련돼 보였고, 코트 옆트임이 길게 들어가 있어 멋스러웠다. 커다란 단추들이 달려 있어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수도사들이 입는 옷처럼 칙칙해 보인다. 짙은 회색이라는 점도 그런 인상을 더하는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이 코트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흐흐흐...“

희미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건 분명 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남들이 나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게 싫었던 거다. 특히나 독일인 앞에서, 그것도 아르바이트 학생 신분으로 면접을 봐야 하는 자리에서는 가능한 한 당당해 보이고 싶었다.

"에이~~“

치렁치렁한 코트 자락이 자꾸 자전거 바퀴에 걸려 들어간다.

3개월 전, 벼룩시장에서 10유로에 산 고물 자전거가 코트와 함께 내 처지를 더욱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제 괴팅엔 지방신문 구인란에서 레스토랑 서빙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글을 보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용기? 그래, 내겐 지금 이 순간 큰 용기가 필요하다.

1년 전, 유학생 신분으로 독일에 왔고, 그동안 두 차례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하지만 지금 내 통장 잔고는 겨우 120유로뿐이다. 집에는 차마 말할 수 없다.

전세금 1,000만 원을 빼서 내 유학 초기 비용을 마련해 주신 부모님, 특히 엄마의 결단은 지금 돌이켜봐도 큰 용기였다. 집안 경제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더 이상 생활비를 보내달라는 말을 꺼낼 수 없다. 다음 달 기숙사 임대료도 막막하고, 건강보험료는 말할 필요도 없다.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비행기 표를 살 돈조차 없다. 이런 상황을 두고 ‘사면초가’라고 하던가. 하지만 그런 표현조차 내겐 사치스럽고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이 현실이 주는 중압감이 너무 커서일까. 스물여섯이 감당하기엔 벅찬 걸까. 생리가 멈춘 지 꽤 됐다. 한두 번쯤 건너뛰는 건 편한 일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저 웃픈 현실일 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수돗물 한 잔을 마시고, 회색 롱코트를 최대한 깔끔하게 입었다.

기숙사에서 레스토랑까지는 걸어서 약 한 시간, 자전거를 타면 15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전거를 선택했지만, 막상 타려니 손발이 덜덜 떨려 탈 수가 없었다. 앞으로 마주해야 할 순간들이 너무 낯설고,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기분과 싸워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해!

내겐 외국인 학생 신분으로 1년에 최대 3개월밖에 일을 할 수있다.

‘이건 헛수고야!’

내 안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피만 흘리지 않을 뿐,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마치 군부대의 시계는 어쨌든 간다는 어느 우울한 병사의 푸념 섞인 희망처럼, 나도 어느 순간 드디어 레스토랑 앞에 서 있었다.

시계를 보니, 미리 약속한 10시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있었다.

‘이크... 30분을 어디서 때우지?’


레스토랑 문은 잠겨 있고, 마치 오늘이 휴일인 것처럼 조용하다.

하긴, 독일은 어디를 가든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죽은 도시처럼 적막하다.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없고, 담벼락 아래 낡은 의자를 두어 개 세워 놓고 옹기종기 모여 햇볕을 즐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은 쉼 없는 물음놀이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휴식 쟁취!"를 외치는 시위대의 열기처럼, 내 안에서도 끊임없는 의문들이 소용돌이쳤다.

‘잘못 온 건가?’

갑자기 등 뒤쪽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며, 식은땀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감지했다.

다시 한 번 주소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 이곳이 맞다.

‘휴... 다행이다!’

그래, 내가 너무 일찍 온 거야. 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곳 사람들의 장점 중 하나는 한국인들이 흔히 독일인의 미덕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점,

‘독일인들은 정확하다.’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문은 정확히 10시 30분에 열릴 테니까.


그렇게 10분쯤 서성이고 있는데, 레스토랑 문이 열리면서 부스스한 얼굴의 털복숭이 독일인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누구시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에 힘을 주기 위해 배꼽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어제 아르바이트 때문에 전화했던 학생이라고 모기 기어가는 소리로 답했다.


"아...!! 그래요. 빨리 오셨네요. 들어오세요.“


털복숭이 남자는 겉으로는 친절하게 말했지만, 어딘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망할 놈의 그 순간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더 떨리기 시작했다. 면접이라고 하기엔 5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털복숭이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고, 서빙은 밤늦게까지 하는 일이라며 주절주절 무언가를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쐐기를 박는 듯한 질문이 날아왔다.


"노동허가증은 있나요?“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괜한 변명이라도 늘어놓기 전에 그냥 나와버릴 걸.

지금 너무 후회된다.


"저는 1년에 방학 동안만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통장에는 현재 120유로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돌아갈 비행기표를 살 돈도 없습니다."


어제 밤에 써놓고 수십 번 연습했던 문장들.

나는 그것을 외우듯이 내뱉었다.

그리고 그 털복숭이의 표정.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난 당신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는 마치 아침잠을 쓸데없는 일에 허비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은 지나치게 정중했지만, 그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Weender Park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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