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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 Jan 30. 2023

알 수 없는 삶에게 보내는 찬가

<메이킹 웨이브:영화 사운드의 예술>(*왓챠)을 보고, 영화와 삶에게

<THX 1138>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1971년 3월 12일, 한 신문은 이 영화에 대한 타이틀을 혹독하게 뽑았습니다.  

<THX 1138>이 보는 미래: 음울한 영화, 음울한 흥행


영화는 형편없는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조지 루카스와 프랜시스 코풀라가 만든 영화사 '조트로프'에서 선보인 SF 영화는 정말로 음울한 분위기였습니다. 머리를 벽에 찧고 또 찧는 장면이 삽입되었고, 일렉트로닉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SF 영화의 근사하고(당시로서는) 화려한 볼거리는 없었습니다. 영화적 커리어를 모두 잃고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했던 조트로프에게 들어온 것이 열 몇명의 감독이 모두 거절한 뒤 돌아온 '지저분한' 갱 영화였지요. 그것이 바로 <대부>였다는 대목에서 인생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은 <THX 1138>의 한 장면처럼 벽에 머리를 찧는 것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게 느껴질지라도 어느날 나를 찾아온 시시한 기회가 알고보니 평생 우리 곁에 남을 <대부>를 만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1시간 34분간 다큐멘터리는 무성 영화 시대의 종말에서부터 <스타워즈>까지 긴 흐름을 다룹니다. 그 안에 위에서 말한 '조지 루카스'와 '프랜시스 코폴라'가 있는데, 조지 루카스는 이후 '스타워즈' 시리즈를 감독하고 '인디아나 존스'의 각본을 쓰게 됩니다. 삶은 이상하죠. 걷고 또 걷다보면 어떤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 걷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사운드는 영화와 관객을 결합하는 힘을 가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한스 짐머의 음악뿐만 아니라, 바람과 물이 흐르는 소리에서부터 발소리,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까지 다양합니다. 사운드의 마지막 단계에는 사운드 믹싱 단계가 있는데, 재녹음 믹싱이야말로 사운드의 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운드 에디터들이 저마다의 분야에 주력해 만든 구성 요소들을 취합해 하나의 장면에 맞도록 조절하는 것입니다. 발소리면 발소리, 우리가 흔히 '사운드 트랙'이나 'OST'라고 아는 영화 음악을 비롯해 전문 분야들을 모두 모아 장면에 맞게 조절하는 단계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요?


감정을 고조시키려면 음악을 가장 크게, 액션씬에서 주먹이 충돌하거나 총알과 폭탄의 소리를 키워야 한다면 사운드 효과 볼륨을 높이며, 배우의 대사와 연기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면 사운드와 음악을 낮춥니다. 카메라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사운드가 움직이는 기술은 '패닝'이라고 부르고, 트랙을 쌓고 또 쌓다가 드디어 '좋아, 영화 나왔어!'하고 미소 짓는 순간 우리가 극장에서 본 바로 그 영화가 됩니다.


영화를 만드는 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지 생각해보세요. 그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탄생하기에 영화는 멋집니다. 그러나 삶 역시, 우리가 영화를 보며 공기처럼 스쳐 지나가곤 하는 수많은 사운드 효과처럼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류의 존재 비결은 삶의 가장 깊은 단계를 경험하는 데 있습니다. 심신의 기저에 위치한 의식의 무한한 바다에서 울려 퍼지는 사운드의 역할은 추상적인 영화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경험을 시켜 주기 위해 심연의 세계로 사람들을 데려오면 그들은 몇년이고 헤어나올 수 없는 겁니다.


삶은 이상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몬스터>(*패티 젠킨스 작)처럼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굿 윌 헌팅>, <E.T.>처럼 성장할 수도 있겠지요. 삶은 <스타워즈>의 멋지고 기발한 소리가 나는 우주처럼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게 돌아가지만 그럼에도 즐거울 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걸고 경쟁하던 것이 <홍등>처럼 허무하고 불합리함을 알 수 있을 테고, <헤드윅>처럼 사랑은 고통과 무척 가까우나 어쩌면 그 모든 고통과 사랑의 뭉클한 감정이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사건을 겪기도 하겠지요.


<틱, 틱, 붐!>에서도 비슷한 것을 생각했습니다. 삶은 알 수 없다고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야 하는데, 사실은 가망 없는 사막처럼 느껴질 때조차 곁에 사람이 있고 시시한 실패들로 이어져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조나단 라슨이 어느날 젊어서 죽고 그의 노래는 브로드웨이에 황홀히 울려퍼지는 것처럼 이상하고 알 수 없지만 어떤 형태로든 아름다울 거라고요.


<메이킹 웨이브: 영화 사운드의 예술>에서 나온 것처럼 영화는 감정을 안전하게 담아둘 수 있는 곳이죠. 러닝타임이라는 단어를 그래서 좋아합니다. 영화의 실감나는 사운드와 배우들의 멋진 연기, 영상에 감독이 담은 메시지를 이해하고 즐기며 함께 달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달려, 포레스트, 달려!' 하고 외치는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영화를 만들지 않고, 단지 즐겁게 사람들의 노력과 노동력이 들어간 것을 보는 관객 입장이지만요. 만약 왜 영화가 좋으냐고 묻는다면 저는 멋지게 대답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영화광인 이유에 대해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마지막 시퀀스처럼 영화를 진로로 삼을 것인지, 앞으로 그럴 예정이 있는지와 함께 묻는다면 제 답은 '그건 아니고 그냥 영화 보는 게 좋아요, 다들 살면서 좋아하는 것 하나쯤은 있잖아요.'가 최선일 거예요.


삶은 이상합니다.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외로움을 가졌고 막막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새벽과 맞닿은 밤에 특히 그렇고요. 우리는 존재통을 느껴야 할 것이고 알 수 없는 삶의 궤적을 두려워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상한 삶에서 우리는 무언가 좋아하는 게 생길 테고, 행복할 테고, 기뻐할 테고,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외로움과 고통은 영화의 사운드처럼 어딘가 낯선 외계의 신호음처럼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 행복의 궤적을 형성하기 위한 단계일지도 모릅니다. 꼭 고통스러운 영화 속 유독 평화롭고 아름다운 인서트와 마지막 씬처럼요. 삶은 이상하고, 단 하나뿐인 영화일 것입니다. 주인공은 나이고, 나는 다른 사람의 영화에서는 또 카메오나 엑스트라이며, 앞으로 속편은 나오지 않을 예정이지만 그럼에도 참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왔고 어떤 장면에서만큼은 특별히 아름다운 영화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삽시다. 영화는 계속 달리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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