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무죄!
뮤지컬 <시카고>의 가장 유명한 넘버 ‘셀 블록 탱고’에서 유일하게 죄를 짓지 않은 희생양, 가장 낮은 자, 헝가리인 여자 ‘카탈린’, 그의 대사는 뮤지컬 시카고에서도 헝가리 어 그대로 공연된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영화 ‘시카고’에서도 ‘셀 블록 탱고’ 속 그의 대사들은 번역조차 되지 않았다. 번역가가 헝가리 어를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러한 번역의 공백이 비로소 영화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이 되어 타국의 언어라도 대사를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보통의 영화 번역인데, 이러한 대사의 공백-오직 알아들을 수 없는 타국의 언어-은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 누구도 그의 말을, 진실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언어의 장벽에 인하여, 그리고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경찰에 의하여. 뮤지컬과 영화의 관람객이 극 중 알아들을 수 있는 대사는 ‘uh-uh’, ‘no’, ‘not gulity!’뿐이다. 뮤지컬 <시카고>에서 카탈린이 가장 많이 말하는 대사는 ‘무죄!’다. 그가 무죄라는 것에 대하여 교도소 안의 여자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바깥의 경찰, 재판관, 그리고 엉클 샘은 그를 죄인으로 분류한다. 카탈린은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으며, 다른 이의 해설을 통해서만 관객은 카탈린이 무고함을 알게 된다.
시카고는 무대 구성과 연출에서 조명까지 포함하여 보아야 한다. 무고한 죄인의 넘버가 시작되는 순간, 주변의 죄인들은 붉은 조명 아래에 정지하고 푸르스름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죄인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조명으로 죄인 사이에 무고한 자가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다른 죄인들의 넘버에서는 푸른 조명과 어둠으로 구분하는데, 푸른 조명에서 스스로를 위한 변호를 행하는 죄인들은 범행의 순간을 재생한 순간 붉은 조명 안에 선다. 그들은 무죄를 주장하지만 <리어 왕>이 그랬듯 손에서 피를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를 다른 죄인과 분명히 구별하는 것은 영화 <시카고>에서 손수건이다. 다른 죄인들은 붉은 손수건으로 각자 죽인 남자들의 목을 조르고 손에서 떨어트리며, 혹은 입술에서 끄집어낸다. 붉은 손수건은 희생자의 사인이자 피다. 동시에 죄인들의 죄다. 카탈린은 다르다. 그는 유일하게 흰 손수건을 들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며, 따라서 희생자의 피가 남지 않았다. 하얀 손수건이 결백을 의미함과 동시에 항복을 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아주 일찍부터 그가 무고한 죄인으로 죽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심지어 다른 죄인들이 노래할 때 그는 노래하지 않는다. 셀 블록 탱고 넘버에서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할 때 그는 침묵한다. 카탈린은 아주 마지막에만 입을 연다. 무죄임을 피력하는 부분이다. 넘버 중 카탈린은 자신의 파트에서 발레 하듯 우아하고 느리게 움직이며, 남편을 죽인 것은 자신이 아니며 ‘엉클 샘’에게 결백함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엉클 샘’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엉클 샘’은 무고한 그를 감옥에 넣은 경찰이기도 하지만, 미국이기도 하다. 그는 이민자 여성이며 남편 살해 용의자 1순위인 부인이다. 그러나 그는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 정의롭고 거대한 ‘엉클 샘’이 틀린 것이다. 그러나 무슨 상관일까, 이곳은 시카고다. 그의 처지가 여간 가엾게 된 것이 아니지만 신은 시카고를 만들 때 립스틱, 술과 재즈, 장미와 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시카고에서는 모두가 쇼 걸이다. 심지어는 충격적인 살인사건일수록, 살인자가 부유하고 아름다울수록 살인자를 향해 열광한다. 부유하지 않고 그를 매력 있는 희생자로 만들 빌리 플린이 없는 헝가리 여자에게는 일찍부터 그의 것이 아닌 올가미가 씌워진 셈이다. 그러나 재즈, 재즈, 재즈! 모두가 그것이 쇼임을 알지만 재미만 있다면 그만!
시카고에서 살인은 쇼야!
매디슨 쿡 카운티는 47년간 피를 흘린 적이 없다. 적어도 ‘마마’에 의하면 그렇다. 빌리 플린, ‘말발의 대가, 법정 안의 황태자’, 돈만 받는다면 살인마도 가엾은 성모로 만들 수 있는 변호사가 있는 한 매디슨 쿡 카운티는 쇼 뒤편의 잡다한 자들이 모인 분장실에 불과하다. 빌리 플린이 등장한 순간, 영화 <시카고> 속 무고한 죄인은 간절히 외친다. not guilty!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항변을 한다. 그러나 빌리 플린은 ‘판사에게 말하라’며 카탈린을 지나친다. 그를 움직일 만한 큰돈을 내지 못하는 그의 사정을 뻔히 아는 것이다. 그는 가난한 이민자이며, 돈을 지불할 남편은 죽었다. 철창에 달라붙어 간절하고 초췌한 얼굴로 그를 보는 카탈린은 손에 종이 뭉치를 쥐고 있다. 그것이 다른 죄수-벨마-대신 허드렛일을 하며 모은 돈일지, 그의 사정을 부족한 언어로 수없이 고쳐 쓴 간절한 편지 일지 우리는 영원히 모른다.
돈을 지불할 남편이 있는 록시 하트는 경우가 다르다. 시카고에서 살인은 쇼다! 모두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결혼 생활까지 소비하고 그가 쓰던 물건을 유명 인사의 친필 사인을 사들이듯 경매에서 열광적으로 경쟁까지 해 가며 구한다. 이곳이 시카고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모든 배우가 인형처럼 연기하고 붉은 끈에 매달려 연기하는 넘버다. 살인 사건에 관한 열광적인 관심을 ‘시카고’라는 상자 안에 안전히 넣어 풍자했으나, 우리는 모두 사실 나날이 잔인해지는 아동 학대 사건과 강간, 살인 사건을 쇼처럼 소비하고 있다. 살인범의 과거를, 관상을, 그를 아는 동창들의, 이웃, 동료, 말, 말, 말! 그들은 셀 블록 탱고의 가사를 빌려 ‘죽어도 싼’ 인간들이지만, 우리는 사건을 지나치게 쇼처럼 소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한다. 범죄 사건은 어느 나라던 빨리 잊힌다. 마치 록시 하트의 재판이 끝나자마자 더 자극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해 사람들이 그곳으로 관심을 돌린 것처럼 매일 우리는 끔찍한 사건을 보게 된다. 때로 ‘유명한’ 살인자들은 팬이 생긴다. 그들이 아름답거나 잘생겼을 때, 혹은 기자들이 더 눈에 띌 기사를 쓰기 위하여 그들을 악마처럼 묘사할 때 팬들은 팬레터를 보내고 그를 모방한다. 그렇기에 범죄자들을 악마처럼 묘사해선 안 된다. 그들은 이마에 뿔이 달리고 염소의 길쭉한 가로 동공을 지녔으며 발굽이 둘로 갈라진 사탄이 아니다. 살인은 매력적이지 않다. 사이코패스는 매력적이지 않다. 그들은 사회 부적응자이며 마주하기 싫은 추잡하고 비겁한 인간이다. 마마가 틀렸다. 살인은 쇼가 아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카탈린의 헝가리 스타일 증발 묘기를 선사합니다!
영화에서는 서커스의 프리마돈나인 곡예사의 분장실처럼 꾸며진 거울 앞에서 장면이 시작된다. 뮤지컬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해 우아하게 사다리를 오른다. 아슬아슬하게 사다리에 매달려 인사를 남긴 카탈린의 마지막 대사는 이제는 모두가 아는-‘무죄!’다. 뮤지컬에서는 커튼 옆에 매달려, 벨마와 록시가 수도 없이 매달려 자기변명과 거짓말과 남편 흉을 보았던 바로 그 사다리다. 음악이 고조되고, 환상처럼 현실의 교수대에 오르는 카탈린의 검은 구두와 <백조의 호수>의 발레리나처럼 온통 순백의 무대 의상을 입고 묘기를 선보이는 카탈린을 번갈아 비춘다. 검은 구두가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내딛으면 장면은 하얀 구두가 한 발짝 발을 내딛는 전환 된다. 현실의 카탈린은 점잖고 어두운 옷을 입고 흐느끼지만 환상의 카탈린은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은 채 날개를 활짝 펴 날아오르려는 백조처럼 팔을 뻗는다. 현실의 카탈린은 죽는 순간까지 두려워하지만 환상 속 카탈린은 망설이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도취된 사람처럼 이 순간을 음미한다. 꿈을 꾸는 표정이다. 뒤로 뻗은 두 팔은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떠오르는 동작이다. <백조의 호수> 4막에서 그를 구해줄 연인, 왕자 지크프리트가 사악한 마법사와 흑조에서 속아 넘어가 영원히 백조로 살게 된 오데트가 지크프리트와 함께 호수로 뛰어내려 차라리 함께 죽기를 결심하는 장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카탈린의 의상은 절묘하다. 4막에서 지크프리트와 오데트는 죽는다. 백조는 죽는다. 카탈린은 죽는다. 새는 낙하하여 교수형대에서 죽는다. 카탈린의 차게 얼어붙어 있는 힘껏 주먹 쥔 손과 검은 구두를 마지막으로 장면은 끝이 난다. 그가 꺼낸 하얀 손수건처럼 하얀 무대 의상이 결백한 백조 오데트에 대한 메타포가 맞다면 카탈린은 천국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뮤지컬 <시카고>의 끝에서 록시와 벨마가 성황리에 공연을 개시하며 외치는, ‘미국의 정의, 공정함’에 대한 찬탄을 생각하면 더욱 씁쓸해질 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결백한 자가 죽고, 죄를 지은 사람은 살아 제2의 황금빛 인생을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아이러니한 일이다. 카탈린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인데, 가난한 이주민이었던 인물을 무고하게 유죄로 몰아 사형이 집행될 위기에서 다행히도 당시 흔치 않았던 여성 변호사가 그를 구하게 된다. 그는 마찬가지로 실존 인물인 벨마와 록시처럼 아름답지 않았고, 그의 외모를 조롱하고 비하하던 언론과 배심원단의 편향된 판결로 한 차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변호사의 조언으로 외모를 가꾸고 패션에 신경을 쓰자 언론의 반응은 훨씬 유해졌다. 그러나, 정말이지 정의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