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행 편도 비행기를 탔다
28인치 캐리어 두 개와 백팩 하나에 영국으로 가져갈 한국에서의 삶을 담았다. 가져가고 싶은 걸 다 담기엔 28인치 캐리어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짐을 싸는 과정에서 그나마 찾은 장점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챙긴 캐리어 두 개와 백팩 하나, 그리고 영국행 편도 비행기표를 들고 처음 가보는 런던으로 향했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한국에 두고 온 소중한 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물건은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든 캐리어에 욱여넣어 가져올 수 있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었으니까. 공항 배웅을 나와 출국 게이트에서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던 가족들, 영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응원해준 친구들과 전 직장 동료들, 그리고 너무나도 보고 싶을 우리 집 강아지와 고양이. 그렇게 기다리던 영국행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던 건 한국에 두고 온 소중한 이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세 편, 책 한 권, 그리고 쪽잠 몇 번 끝에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대 앞에 줄을 섰다. 필요한 서류를 여러 번 확인했으니 별 문제가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입국 심사대 앞에 서면 늘 약간의 긴장감이 감돈다.
“영국에 온 이유가 뭐죠?”
“일하려고 왔습니다.”
“비자 타입은 뭔가요?”
“워킹홀리데이 비자입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몇몇 질문에 대답하니 여권에 입국 도장이 찍혔다. 입국 도장을 바라보며 영국에 무사히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제 정말 런던에서의 삶이 시작된다는 게 조금은 실감 나기 시작했다.
공항에 있는 유심 자판기에서 잘 터진다는 심카드를 하나 사 핸드폰에 끼웠다. 나에게도 영국 핸드폰 번호가 생겼다. 앞으로 여기서 쓰게 될 낯선 번호를 외우려고 여러 번 되뇌어 보았다. 핸드폰 데이터가 연결되고 카카오톡을 열어 보니 출국할 때 보내 준 가족들과 친구들의 배웅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나 잘 도착했어!”라고 답장을 보냈다. 자판기에서 1분 만에 구매한 심카드 하나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음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공항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임시 숙소로 향했다. 지하철 안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동양인이 적어 보였다. 괜히 뭔가 다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마음에 무릎에 올려둔 백팩을 꽉 껴안았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인들에게서 소매치기가 많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지 쉽사리 경계 태세를 늦출 수 없었다. 동양인은 돈이 많다는 인식이 있어 소매치기의 쉬운 타깃이 된다는 무서운 얘기도 들었다. 생긴 것만으로 범죄의 타깃이 된다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큰 캐리어 두 개를 옆에 두고 무릎 위에 있는 백팩을 꽉 껴안고 앉아있는 나는 누가 봐도 지금 막 런던으로 이주한 외국인이었다. 그래서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더 유심히 관찰하고 더 철저히 경계했다.
한 시간 반 남짓 지하철로 이동해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10분을 더 걸어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괜스레 센티해졌던 12시간 동안의 비행과 경계를 늦출 수 없었던 한 시간 반 동안의 지하철 이동 끝에 도착한 따뜻하고 안락한 방을 보니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의 긴장이 풀리면서 막대한 피로가 몰려왔다. 아직은 낯선 런던과 친해질 수 있을까? 일단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