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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GOOO Oct 27. 2024

영화 속 삼각형은 어디에 있었나

<슬픔의 삼각형> 비평

 

우리의 눈은 세상을 바라볼 때 물리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사람들은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서있는 지점 100-200cm 위에서 바라보며 살게 된다. 우리의 시각적 상상은 무한하지만, 살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시선의 95% 이상은 고정된 지점에서 살고 있다. 영화는 그런 우리에게 카메라라는 도구를 통해 새로운 시선을 선물한다. 영화에서는 관객들이 지속적으로 제3자가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관람한다. 또는 그들의 시선을 빌려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에서는 이러한 영화적 시선에 대한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우리 관객이 제3자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객관적(개인적)일 수 있는 시선(감독의 의도가 들어가 있지 않는 시선)을 카메라로 제공한다. 그 시선의 순간들이 영화의 제목처럼 삼각형이라는 도형을 완성하는 순간이 된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프롤로그)에서는 캠코더로 촬영된 일부 영상들이 나열된다. 영화 속 배우들은 카메라를 응시하며 인터뷰에 응한다. 배우의 직접적인 카메라 응시는 관객과의 제4의 벽을 파괴하게 되는데, 인터뷰를 진행하는 캠코더의 시선으로서 이러한 카메라의 시선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한다. 이런 장면 외에도 영화에서 보여주는 연극적 순간-연극에서도 서사극적인 순간-들이 많이 존재한다. 챕터 1,2,3으로 나눠진 3막 구조. 거대한 3막 구조 속에서 보이는 분리적이고 병렬적인 이야기 구성(플롯의 파괴). 카메라가 멈춰있는 롱 쇼트의 거리감. 앞서 설명한 제4의 벽을 파괴하는 행위 등 영화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영화적 표현으로 재서술했다. <슬픔의 삼각형>은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추구하는 관객 능동성, 주인공의 모호성, 능동적인 열린 결말 등 여러 서사극적인 측면을 통해 관객이 영화 속에서 함께 숨 쉬고 소통하길 희망한다.


영화의 계급관계는 생각보다 심플하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그 사이에서 사회적인 여러 레이어들이 존재하고 발동되지만, 결국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이렇게 두 점으로 존재한다. 삼각형은 세 점으로 이루어진 세 변의 도형인데. 영화에서는 지속적으로 계급 피라미드론만 이야기하고 보여주고 있다.(영화에서 챕터마다 굴러가며 변화하는 계급 피라미드도 하나의 삼각형이라고 볼 수 있다 - 그 삼각형은 계속 뒤집어지지만 항상 같은 모양이다.) 관객은 영화 내 인물들에게서 명확한 세 개의 꼭짓점은 찾지 못할 것이다. 인물들은 단순하게도 두 점이 연결된 하나의 선으로 보인다. 필자가 생각하는 나머지 하나의 점은 바로 카메라이다. 즉 우리의 시선이다. 능동적인 관객의 태도를 추구하는 서사극적인 영화적 장치들은 즉각적으로 변화하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를 비추며 관객들이 판단하도록 되어 있다. 관객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이 영화의 내용은 정말 달라지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야야와 에비게일의 순간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러분들은 엘리베이터를 보고 기뻤는가? 혹은 무너졌는가? 그리고 달려가는 칼의 모습은 어떻게 보였는가? 이러한 생각에 대한 꼭짓점이 야야(부르주아)의 한 점과 에비게일(프롤레타리아)의 한 점,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의 한 점으로 삼각형이 완성된다. 우리가 어떤 자세(생각)를 취하는가에 따라, 그 삼각형의 모양은 슬픔의 삼각형처럼 역삼각형이 될 수도 있고, 계급론적인 피라미드의 정방향의 정삼각형이 될 수도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가변적이다. 영화와 연극의 가장 큰 차이점은 피사체(배우, 소품 등)와 관객과의 물리적 거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연극은 내가 구매한 좌석에서 이 극의 처음과 끝을 함께해야 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는 카메라의 시선이 관객들에게 동일하게 제공된다. 영화가 추구하는 이미지의 예술성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시선을 선물한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이 시선을 가장 개인적일 수 있는 시선으로 만든다. 영화 속 예로는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카메라에 있다. 위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잦다. 카메라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으로 인물들을 따라간다. 그러다 멈춘다. 챕터 3 초반부, 야야와 어떤 남성이 있는 해변 돌 뒤 공간에서 자고 있는 야야와 그녀를 바라보는 남성의 모습을 카메라는 하이레벨, 하이앵글의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다.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사운드(“인 더 볼켄!”)와 함께 남성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이동한다. 카메라는 그 남성을 쫓고, 새롭게 표류한 인물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등장한다. 남성은 그들에게 달려가지만, 카메라는 그렇지 않다. 카메라는 그 돌을 넘지 않은 채, 그들을 멀리서 관조한다. 카메라는 그 지점에서 정확히 1분 49초 동안 멈춰있다. 그 1분 49초라는 시간 동안 인물들은 프레임 인 되기도 하고 아웃되기도 한다. 또한, 전경과 후경 사이를 맘껏 다니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고정된 카메라의 거리는 마치 우리에게 연극을 보는 듯 만든다. 그 시간 동안 감독의 의도가 들어간 부분은 인물의 움직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순간에서는 인물들이 큰 의도를 갖고 움직이지 않는다. 감독의 의도가 가장 적은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카메라의 순간에서 우리는 감독에게 침해받지 않는 가장 개인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앞선 문단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시선의 순간이 자신의 한 점을 찍게 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예로 든 장면 말고도 영화 전반적으로 이러한 촬영은 의도적으로 반복된다. 우리는 감독에게 이렇게 부여받는 시선을 기반으로 능동적 관객이 되며, 영화와 상호작용하며 결말을 맞이한다.


열린 결말로 끝나는 이 영화는 감독이 우리에게 부여한 능동적 역할을 기반으로 세상을 곱씹어보게 된다. 블랙코미디라는 장르 속에서 이러한 목적성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모두가 다르지만, 이 영화는 서사극을 기반으로 영화적 성취를 이끌어낸다. 이미지와 내러티브의 적절한 혼용과 탁월한 이미지(카메라의 물리적 위치와 미장센)의 선택은 우리가 영화 속에서 하나의 점이 되기에 충분한 시도였다. 이러한 성취가 ‘삼각형’이라는 도형의 모습으로 각자 마음속에 남아있게 된다. 그 ‘삼각형’은 모두에게 다 다르게 생겼다. 영화 내에서 보이는 다른 아쉬움을 뒤로하고, 관객들에게 각자 다른 ‘삼각형’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영화적 가치가 충분하다. 게다가 그 삼각형이 영화 외적(관객과의 상호작용)으로 피어날 수 있게 만든 성취는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적 성취에도 크게 부합한다. 이 영화를 보고, 각자 자신의 점은 어디에 있는지, 그 점으로 연결된 개개인의 삼각형은 어떤 모양인지 상상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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