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글나글 Aug 21. 2021

집순이지만 취미는 딱히 없습니다

생산적이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건 많은데요


자타가 공인하는 프로 집순이인 나!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도, TV에 나오는 연예인 중에도 집순이는 많다.


하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집순이는 집에서 무언가를 쉼없이 하는 걸 좋아하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생산적 집순이’이다.


손재주가 남다른 내 친구는 집에서 사부작 사부작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덕분에 이 친구에게 정성 담뿍 담긴 선물도 자주 받았다. 한창 비즈공예에 빠졌을 땐 한동안 줄기차게 하고 다닐 만큼의 팔찌, 반지를 받기도 했고, 한 번은 뜨개질로 또 한 번은 원단을 바느질해 만든 예쁜 티 코스터를 받기도 했다.


이 밖에도 캘리그라피, 과일청 만들기 등등 친구는 손을 쉬지 않을 거리를 찾는 듯 무언가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내가 아는 제일 바지런한 집순이다.






스타들의 일상을 공유하는 관찰예능이 몇 년 동안 유행하면서 본인이 집에 있는 걸 너무 좋아하는 ‘집순이’, '집돌이'라는 수많은 연예인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들 역시 집에서 무언가 계속 하고 있다. 정원 가꾸기, 프랑스 자수, 그림 그리기…


나는 어떻냐고?

 그대로 집에 있는  자체가 너무 좋은, 그냥 집에 있어 집순이인 사람이다. , 그래! ‘ 덕후라고 하자!


누군가 내게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라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게 없다. 남들에게 얘기할 때 뭔가 있어보이는 취미가 없다고 하는 게 맞겠다.






2019년, 한창 번아웃이 와서 무기력하고 삶이 재미없을 때,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급하게 시작했던 게 있었다. “색연필 그림 그리기”였는데, 돈 주고 취미를 배우는 온라인 서비스에서 찾은 거였다. 수강권과 함께 색연필, 빳빳한 도화지, 색연필깎이까지 풀 패키지로 ‘구매’했다.


‘주말에 누워만 있지 말고 이거라도 하며 생각도 비우고 성취감도 얻어보자.’ 하면서 호기롭게 시작했다.


영상으로 찬찬히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그림을 완성해나갔다.


음, 확실히 우울한 잡생각도 안 들고 따뜻하고 여리여리한 색연필이 만들어내는 색감과 질감에 마음이 평온해지기까지 했다. 그림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기대했던 성취감도 들었다. 뿌듯함에 사진을 찍어 동네방네 내 그림을 자랑하고, 한껏 감성적인 척하는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어 업로드하기도 했다.


급조된 나의 취미



세 작품(?) 정도까지는 재미있게 완성했던 것 같다. 주말에 집에서 산송장처럼 늘어져있지 않고, 일부러 그림 그린다는 핑계로 카페라도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나름의 노력을 했다.


그렇게 3주 정도 지났을 때였나? 회사 일이 갑자기 몰아치면서 야근하는 날도 잦아졌다.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폭삭 익어 숨이 다 죽은 파김치가 되어 그림은 커녕 화장 지우는 것도 겨우 해냈다. 주말에는 말해 뭐하겠는가. 오후까지 자고 일어나도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아 누워서 골골대다 가뜩이나 쏜살같이 지나가는 주말을 허망하게 보내버렸다.

이건 뭐 번아웃 온 사람이라기엔 너무 열일을 했던 거지.


그렇게 나의 랜선 선생님과 색연필은 잊혀지고 있었다.

문득 '아차' 싶어서 취미 클래스 앱에 들어가보니 내 수강권은 이미 기간이 만료돼 있었다. 아, 내 돈...

솔직히 말해서 내가 정말로 이 색연필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삼고 싶었다면, 위에 늘어놓은 저 장황한 취미 실패의 요인들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저렇게 힘들 때일수록 나에게 생기를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취미일 텐데, 나는 너무 쉽게 색연필을 놓아버린 것이다. 꼭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리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도 충분했을 테고...






"색연필 그림 그리기는...나와 함께 갈 수...없습니다!"


랜선 클래스로 취미 찾기에 실패한 나는 깨달았다. 나의 취미는 서바이벌 오디션으로 스타감을 찾듯이 그렇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저 온라인 취미 클래스는 아주 좋은 서비스다. 그저 나라는 사람에게 맞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나는 정말 번듯한 취미와는 맞지 않는 인간인 걸까?


저런 생산적인 취미는 아닐지라도, 나도 좋아하는 건 많다!

인생영화와 드라마 다시 보기,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 틀어놓고 신나게 청소하기,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 시간 맞춰 본방사수하기, 홈데코, 커피 한 잔 하며 책 읽기, ASMR 들으며 잠들기, 홈트로 명상요가하기, 예쁜 카페에서 커피 마시기, 그리고 이렇게 내 생각, 내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거…


음악과 함께 독서하는 나...제법 감성적이에요


오, 적어놓고 보니 나 완전히 취미부자잖아?


그래, 솔직히 취미라는 게 남들한테 그럴 듯하게 소개하기 위해서, 면접에서 있어보이게 대답하기 위해서 붙이는 건 아니잖아? 그걸 할 때 내가 진짜로 행복하면 그게 취미지.


그건 부럽긴 하다. 무언가가 너무 좋아서 흠뻑 빠져 오랜 시간 동안 해오며 인생의 낙을 느끼는 사람들 말이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그건 그들 인생이고, 나는 나답게 살면 그만이다.


언젠가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언니가 우연히 네 인스타그램을 봤는데, 온통 카페서 마신 커피 사진, 데일리룩 사진 아니면 셀카랑 같이 올린 회사에서 힘들었다는 얘기밖에 없더라면서, 한창 좋을 때 더 재밌게 즐기면서 살라고 그러더라."


이 말은 듣고 난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맞아, 내 인생은 지금 그게 다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이기도 하고. 언니가 나 재미없게 사는 것 같아 걱정됐나 보다. 그래도 난 지금 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고 있는 거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전해줘!"


누군가가 볼 때 내가 참 단조롭고 재미없게 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나도 쳇바퀴 같이 굴러가는 내 삶이 권태로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예쁜 카페서 커피 마시기'와 '매일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출근하는 것'이 그 권태로운 일상 속 내 행복이었다. 그건 제3자의 눈으로 평가할 수 없는, 오롯이 나만이 느끼는 행복인 것이다.






이제 나는 억지로 내 취미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도 충분히 행복하다.


아! 최근에 재미를 붙인 신상취미가 생겼다. 타로카드 독학!

자연스럽게 관심이 커져서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타로카드와 함께 관련 서적을 사서 찬찬히 익히고 있다. 지금 나는 타로의 세계에 홀딱 빠져있는 상태다.


랜선으로 배우던 색연필 그림 그리기와는 마음부터 다른 걸 느낀다. 취미 클래스의 강의 리스트를 뒤져서 찾은 취미가 아니라,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어서 그런 거겠지?


이래도 내가 재미대가리 없이 사는 인간이야?

알 게 뭐야, 그렇게 보이든가 말든가. 내가 재미있으면 된 거지! 안 그래?





작가의 이전글 내가 바로 진또배기 집순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