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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글나글 Aug 22. 2021

인간 리트리버가 인류애를 잃어갈 때 1)

1편) 믿고 거르랬잖아, 가.족 같은 회사


 2 전부터 대한민국을 휩쓴 것이 있다. 바로 성격유형검사 ‘MBTI’. 나도 유행에 편승해 한동안 MBTI 빠져 살았다.  MBTI 뭐냐고? ENFJ! (자문자답)


ENFJ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다. 나아가서 사람들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데 큰 노력을 쏟는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엔프제(ENFJ를 줄여 이렇게 부른다.)’ 그 자체다.


학교 다닐 때는 반 친구들과 두루두루 모두 친해서 여기 껴도, 저기 껴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애였고, 수업하기 싫은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떼를 쓰면 선생님들은 못 이기는 척 수업을 빨리 마쳐주시곤 나를 앞으로 불러 개인기를 뽐낼 기회(?)를 주셨다. 나도 못 이기는 척 나가서는 지친 친구들을 빵 터지게 만들고 뿌듯하게 자리로 들어오곤 했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팀 내 막내시절에 나는, 회사 다니는 게 참 행복했다. 웬 미친 소린가 하겠지만 정말이다.

우리 팀 상사들에게 살갑게 다가가 금세 친해졌고, 팀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서 척척 준비하는 살림꾼 역할을 하며 일도 빠릿빠릿하게 했다. 칭찬 받고 사랑 받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우리 팀 마스코트라는 말은 ‘엔프제’를 춤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는 사람이, 아니 ‘인간’이 미워 죽겠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 받고 사랑을 주는 게 행복이었던 내가,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졌다는 건 나조차도 믿기 힘들다.


이 기이하고도 비극적인 변화는 내가 30대가 되면서 급속도로 진행됐다. 사람 좋아하고 사랑 주는 걸 행복으로 여기던 인간 리트리버인 내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인류애를 상실하게 됐는지 얘기해 볼까 한다.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새롭게 들어간 회사는 20대 초반의 사회초년생이 유난히 많았다. 그때 내 나이가 32살이었는데 나는 거의 왕언니벌이었다. 출근 첫날, 솔직히 이 날부터 싸한 분위기를 감지하긴 했다. 아무도 나에게 인사를 안 한다. 내가 먼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니 그제서야 어정쩡하게 “네에, 안녕하세요…”하는 것이다. 뭐야, 여기?


어린 직원들이 많아서였을까, 회사 분위기는 회사라기보다 대학 동아리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수평적인 분위기도 아니었다. 회사 대표와 이사가 그 어린 직원들 위에 거의 왕과 왕비처럼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고 보니 그 둘은 부부였다. 하, 가족회사 믿고 걸렀어야 하는데…


그 회사는 직원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만, 직원들에게서 나오는 아이디어에 의한 일은 거의 없었다. 대표와 이사가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던지면 그걸 현실로 만들어내는 것이 직원들의 일이었다. 뭐, 이런 회사 아직도 더러 있다고는 하지만 이 회사처럼 답정너 기질 심한 곳은 처음 봤다.


내가 그 회사에 들어간 이유는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분야를 다루는 회사에 들어가 내가 관심 있었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들어가자마자 브랜드를 더 알릴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기획을 정리한 자료를 만들어 대표에게 보고했다. 대표는 내 브리핑을 모두 듣고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 너무 좋은데, 당장 우리가 실행할 건 아닌 거 같아요. 먼저 기존에 하고 있던 것들을 하다가 찬찬히 시도해 보자고.”


뭐 이해했다. 내가 너무 앞서갔나 싶기도 했다. 입사한다면 어떤 것들을 해보고 싶냐고 질문해 몇 가지 답변했더니 굉장히 흡족해하던 면접 때의 그 모습과 너무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날 내가 대표를 이해한 걸 후회하게 된다. 대표는 팀원들을 부르더니 기가 막힌 걸 만들 거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미 본인 혼자 모든 걸 다 정해놓고는 우리에게 주욱 설명해댔다. 영혼없이 듣고 있던 직원들에게 “죽이지? 대박 나겠지?” 따위의 말로 억지 리액션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대표의 그 기획은 너무 구려서 말도 안 나오는 정도였다. 아재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데다가 시대 역행적이기까지 했다. 한창 미투 이슈로 떠들썩할 때였는데 여성을 무슨 남성의 액세서리 정도로 여기는 듯한 말도 안 되는 광고 설정이었다. 표정관리를 잘 못하는 내 얼굴에는 분명 ‘네 기획에서 냄새 나요.’가 써 있었을 거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대표님, 죄송한데 그렇게 콘텐츠며 광고 만들었다가는 욕만 먹을 것 같아요. 팀원들과 같이 좀 더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아보면 어떨까요?”


대표는 훅 들어온 내 말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거두고 말했다.

“그,그래? 왜 욕을 먹지? 좀 과감하게 해야지 먹히지. 너무 몸사리면 안 돼~”


그렇게 그 구리디 구린 프로젝트는 고집불통 답정너 대표의 지시대로 진행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슬슬 이 회사에서의 안전한 탈출을 생각했다. 더 웃긴 건, 대표는 그 날부터 은근히 나를 피했다.


얼마 뒤 더 뒤집어질 만한 일이 일어난다.

나는 이미 그 회사에 있는 정 없는 정 떨어진 상태였기에 ‘건들지 마시오.’의 표시로 이어폰을 낀 채 내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째지듯 날카로운 소리가 이어폰을 뚫고 들려왔다. 무슨 소린가 하고 이어폰을 뺐다. 소리의 출처는 저쪽 이사 방이었다.


이사는 우리 팀 막내 직원과 타 부서 직원을 세워놓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며 혼을 내고 있었다. 심지어 문을 열어놓은 채로…

혼이 나는 직원들은 죽을 죄를 지은 듯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고, 이사는 정말 듣기 싫은 하이톤의 목소리로 따발총처럼 쏘아붙였다. 업무적으로 큰 실수를 하면 상사가 몇 마디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렇게 다른 직원들 보란듯이, 들으란 듯이 쥐잡도리를 하는 상사가 말이 되는가. 게다가 흥분한 이사는 인신공격적인 발언까지 서슴없이 뱉고 있었다.


더 소름끼쳤던 건 한창 ‘갑질사건’이 뉴스에 연이어 보도되고 폭로되던 때였다는 거다. 그렇게 갑질 갑질 난리인데 그걸 보고도 저러는 게 말이 되나? 설마 본인이 하는 짓이 갑질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나 정말 진심으로 촬영해서 신고하고 싶었다. 아직도 그때 결국 신고하지 않은 게 그렇게 후회가 된다.


너무 화가 나고 걱정이 돼서 그 두 직원에게 괜찮냐고 했더니, 두 직원은 좀 심한 말을 듣긴 했지만 자신들이 잘못해서 그런 거니 혼나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닌가.

응? 진심인가?


두 직원은 그 회사가 첫 직장이었다. 더구나 둘 다 2년 정도 다니고 있는 그 회사의 나름 근속자였던 것.

다른 회사는 겪어보지 못한 채로 2년 동안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잡도리를 당하면 이걸 당연하다 받아들일 수도 있는 거구나.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보다 사회생활 조금 더 해 본 선배로서 진심을 다해 이야기해줬다.(이런 것도 꼰대라면 나 꼰대 맞다.)

그건 당연한 게 아니라고. 아무리 잘못했어도 그렇게 인격적이지 못하게 혼을 내는 건 그저 화풀이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사는 나에게도 스트레스를 줬다.

그 회사는 브랜드가 두 가지로 나눠져 있었는데 난 대표가맡은 브랜드 소속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사가 맡고 있는 브랜드의 일이 나에게 왔다. 그것도 그 브랜드 팀 내 막내 직원이 나에게 업무 요청을 하는 희한한 루트로 말이다. 정식적인 업무 협조 요청도 물론 아니었다.


“이 일을 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혹시 누구 지시인가요?”


내 물음에 직원은 우물쭈물 곤란해하며 말했다.

“아, 그게 사실 이사님이 나글 님에게 요청하라고 하셔서… 나글 님이 더 잘하신다고요.”


응? 잘한다고 지들 브랜드 일을 나보고 하라는 게 말이야, 방귀야? 아니,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업무 협조 요청할 수 있다 쳐. 그럼 이사가 그냥 나한테 다이렉트로 얘기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자기는 뒤로 쏙 빠지고 막내 직원 시켜서 뭐하는 거지? 그 직원은 직원대로 곤란하고, 난 나대로 기분 나쁘게 진짜!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따위 업무 지시는 보도 듣도 못했다.


며칠 뒤 이사가 면담하자며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적응은 잘하고 있어요? 일은 어때요?”


옳거니 잘 됐다! 나는 이해되지 않는 업무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이사는 입만 웃는 얼굴로

“아, 그게 좀 힘들었구나. 알겠어요. 앞으로는 브랜드 간 업무는 확실히 분리하도록 하죠.”라며 쿨하게 내 건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뒤이어 덧붙인 말에 나는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나글 씨, 면접 때만큼의 파이팅이 좀 부족한 것 같아요? 우리 조금 더 열정적으로 합시다. 알겠죠?”


뭐라는 거야, 이 여자…

체계도 예의도 존중도 없는 이 회사에서 열정적으로, 파이팅 넘치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 열정 입사하고 며칠 후에 네 남편이 찬물 끼얹어버린 건 알고 하는 소리야?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나가 밉상으로 보이니 모든 게 안 좋게 보였던 나는, 건의랍시고 자기한테 몇 마디 했다고 쌜죽해져서 괜히 기죽이려고 그러는 걸로 느껴졌다.


여기서 그냥 다 쏟아내고 그 자리에서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차피 이들은 고쳐 쓰지 못할 사람들이라는 걸 몇 개월 동안 너무 확실히 알고 있었고, 그만 둘 회사에서 소란 피우면 나만 손해라는 것 정도는 아는 찌든 사회인이 다 되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꾹 참은 게 병이 되고 말았다. 대상포진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거다. 이 병은 백 퍼센트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 병가를 내고 2주 동안 입원을 하게 됐다.


입원한 동안 회사 사람 그 누구에게도 안부 문자조차 오지 않았다. 그렇다. 나 이런 거에 엄청 서운해하는 타입이다.

아무리 그래도 몇 개월 동안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입원까지 했다는데 어떻게 괜찮냐는 말 한마디가 없을 수가…

정나미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긴, 서로 인사도 잘 안 하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너무 큰 걸 바란 거겠지…?


낙 없던 그때의 인스타그램


몸까지 아프고 보니 더 이상 그곳에서 나의 시간과 노동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더 있다가는 대표든 이사든 제대로 들이받고 꼴사납게 그만 둘 것 같았다.


2주 간의 병가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하면서 나는 퇴사할 마음을 굳혔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미련 한 줌 없이 깔끔하게 이별할 수 있었을 텐데, 대표는 거기에 굉장한 피날레를 장식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복귀한 나를 방으로 부르더니 몸은 다 나았냐고 물었다. 재발할 수 있어 당분간 주의해야 하지만 덕분에 괜찮아졌다고 했다.(맞다. 니들이 준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거 소심하게 어필한 거다.)

이 부부는 항상 말을 덧붙여서 사달이다.


“그래요. 건강 관리는 본인이 알아서 잘 해야지요. 몸 관리도 다 능력이잖아~ 알지?”


후…진짜 이 사람들은 한시도 더 상종할 부류가 아니었다.

난 그 날로 사직서를 냈다.






내가 바보였다. 가.족 같은 회사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걸렀어야 하는데! 이 가족은 근데 뭐 자기들끼리도 회사에서 싸우는 막장이었다. 정말 총체적 난국이지 않은가.

난 정말 이런 회사, 이런 사람들은 사회에 발 담그고 처음 겪었다. 그 동안 내가 참 복이 많았던 거였구나 싶었다.


덕분에 나는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있다는 걸 배웠다. 이 회사를 겪기 전까지는 회사 사람이건 회사 밖 사람이건 마냥 좋아서 마음을 퍼주던 나였지만, 변해야겠다고 느꼈다.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


그렇게 사람 좋아하던 나는 인류애를 제대로 상실하고 인생 30년 만에 흑화하는 경험을 한다.

그 회사에서 퇴사하고나서는 다시 머릿속 꽃밭인 생글이 방글이로 돌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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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리트리버가 인류애를 잃어갈 때>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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