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결정을 해버렸어
벌써 올해의 끝자락.
회사에서 나온 지 5개월을 지나 6개월로 접어들고 있다. 요 몇 년 간 가장 오랜 백수생활이다. 예전엔 길어봤자 3개월 정도 신나게 놀다가 다시 머슴살이 할 대감댁으로 들어갔었는데.
자유의 몸이 된 지 5개월, 나는 지금 그냥...자유의 몸이다. 자유로운 몸뚱어리.
이번 퇴사는 왠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았다. 퇴사 직후에는 새로운 삶을 향한 열정 같은 게 이글이글 타올랐다. 어딘가에 더 이상은 속하고 싶지 않았다. 남의 집 일을 해 주며 나를 갉아먹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남의 집 일인데 남의 집 일이라 생각 않고 매달리는 나 때문에 내가 너무 지쳤었다. 사람들과 한 데 섞여 일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 좋아하던 나는 인간불신자가 되어 마음에 철가루 같은 게 잔뜩 껴버린 상태였다.
남은 삶은 나를 위해, 나만을 위해 살자.
그렇게 결심하고 '나만을 위해 살' 궁리를 요리조리 했다. 오, 말로만 듣던 디지털 노마드? 완전 딱이네. 그래,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사는 거야. 다 필요없어. 자유로운 거 최고! 나 최고!
나는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했다. 요즘 핫하다는 것들은 다 알아봤고, 그 중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들로 pick 해서 온라인 클래스로 강의를 들으며 차근차근 개념을 익히고 세팅해 나갔다.
강사들은 막 이걸로 월 천만 원을 번다고, 여러분도 할 수 있다고 희망을 잔뜩 끼얹었다. 물론 천 만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진짜로 사회생활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 없이 웬만큼 살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월 오백만 원 정도 벌면서 살...고 있었으면 차암 좋겠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그저 '자유로운 몸뚱어리'다.
5개월 백수로 지내며 깨달은 게 있다. 나는 생각보다 더 게으른 인간이었다는 거...
물론 준비는 참 열심히 했다. 준비하던 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시작을 해서 실제로 돈도 벌었다. 나머지 하나는 준비를 다 마쳤고 이제 시작만 하면 되는데, 왠지...왜앤지 시작하기가 망설여졌다. '내가 이걸 꾸준히, 성실하게 할 수 있을까?' 뭔가 자신이 없었다.
어느 순간 손을 놓았다. 놓고 나니 게으름이 몰려왔다.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가 주어졌고, 주체적인 삶 속에서 나 혼자 배불리며 살려던 내가, 사실은 완전히 머슴 체질이었...나? 맙소사, 믿을 수 없어!
자타가 인정한 워커홀릭인 내가, 오롯이 나만의 일을 하게 됐는데 일이 오지게 하기 싫다. 너무 귀찮다. 심지어 그들이 말한 월 천만원 벌려면 진짜로 미친듯이 해야 하는 거였다. 디지털 노마드? 이거 쉬운 거 절대 아니었다.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
뭐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그 일'이 좋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일했던 거였다. 재미없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불가능한 인간이었던 거다. (뭐 물론 돈을 왕창 벌었으면 없던 재미도 생겼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어떤 것에도 열중하지 않고 그냥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 자신이 작아보이기 시작했다. 내 존재의 의미가 희미해진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각까지 드는 걸 보고 깨달았다. '아, 나는 아직 회사원 해야겠구나.'
결국 미루고 미루던 포트폴리오를 사부작 사부작 완성해놨고, 서랍 어딘가 처박아뒀던 채용 앱을 다시 들락거리고 있다. 채용 앱에서 이 회사 저 회사, 이런 일 저런 일 접하다 보니 점점 더 일이 하고 싶어진다. 5개월 전 호기롭게 퇴사하며 절대 회사로 돌아오지 않겠다! 결심하던 과거의 내가 너무도 민망할 만큼.
뭐 물론, 다시 회사생활을 할 생각을 하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지옥철에 끼여 졸린 눈 부비며 출근하는 것도, 이리 치이고 저리 쪼이며 받을 스트레스도, 집, 회사, 집, 회사 좀비 같이 반복될 일상도 전부 두렵다.
하지만 뭐든지 내 마음 먹기에 달렸다. 지난 사회생활에서, 그리고 최근 5개월 동안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을 잊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먹을 거다. 항상 제일 중요한 건 '나'라는 거. 일도 사람도 그 어떤 것도 나보다 앞에 두지 말자는 것. 어느 새 자연스럽게 잊고 살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던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
어쨌든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갈 것 같다. 지난 5개월 무한정의 자유 속에서 살다가 나는 다시 약간의 자유를 포기하는 삶을 택했다. 부디 내가 마음 먹은 대로 나를 잃지 않길 바라며, 5개월 동안 디톡스 해놓은 내 몸과 마음이 다시 독으로 차지 않길 바라며,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