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게 되면 미리 빽빽하고 촘촘한
여정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현지에서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를
대비한 여러 가지 플랜을 준비한다.
준비한 여정대로 여행이 흘러가면 안도를
안도하지만
그 여정이 틀어졌을 때는 불안해하고
더군다나 비상상황을 대비한 여러 플랜이 생각과
다르게 작동되지 않을 때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상황을 마주하면서
나의 MBTI 가 INFJ라는 점을 깊이 수긍할 수 있었다.
지난 2월 코로나 이슈가 잦아들고
너도 나도 해외여행에 나설 때
우리 가족도 나고야로 근 3년 만에
해외여행에 나설 수 있었다.
여행지가 확정이 되자마자
나는 블로그, 유튜브를 탐독해 가며
최적의 3박 4일 여정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휴대폰의 구글 맵은 방문희망지를
표시하는 핑크하트로 빼곡하게 채워져 갔다.
공항에 내려서 렌트를 하고 미술관에 갔다가
저녁으로 된장 돈까스를 먹고
다음날 아침은 고독한 미식가에 나온
팥토스트와 커피로 아침을 먹은 후
영화 촬영지 저택으로 옛 성으로 수족관으로 아울렛으로
회사 일은 그렇게 안 하면서
먹고 노는 여행 일정은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다.
사실 여행 자체보다도 여행 일정
즉 여정을 준비하면서 탐색하는 과정에서
더 큰 희열을 느낀다.
여행하는 곳의 역사는 어떠하고
명소는 어디이고 특산물은 어떤 거며
꼭 맛봐야 하는 별미는 무엇인지
널려진 디지털 파편을 조합하는
인간 챗 GPT가 되어 나만의 답변을 준비한다.
그렇게 여정을 준비하다가
네이버 블로그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구글맵에서 평점이 높은 명소나 식당을
찾았을 때
"그래 이거야!!!"
하면서 일정에 넣는데 실제로 방문하고 나서 발견하는 엄청난 풍광이나 풍미에
더하여 상상치 못한 가성비를 경험하게 된다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야 대단하지 않냐? 아빠가 찾은 데야!!!"
"어때 좋지? 나니까 찾은 거야!!!!"
집사람과 아이들한테 이런 너스레를 떨면서
나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어서인지
누구보다 여정에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뿌듯한 존재감은 나만의 몫이지
빽빽한 일정으로 몰아치고 끌려다닌다며
나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이런 여행패턴에 만족보다 불만인 경우가 더 많았다.
가족들이
"여기 좋네 여기서 좀 여유 있게 보자"라고 하면
나는
"아니야 여기는 이제 볼만큼 봤으니까
빨리 다음 일정으로 가야 해 어서 뭐 해?"
라며 재촉을 하거나
"아 좀 이제 그만 숙소로 가자"라고 하면
나는
"무슨 소리야? 한 군데 더 들러야 해" 라면서
일정 준수를 독촉하기 때문이다.
삼 년 만에 나선 해외여행
나고야 여행 이틀째 아침이었다.
나 혼자 6시 30분에 일어나 숙소 내 목욕탕에서
전세 낸 듯 혼자였던 욕탕에서 깨끗이 목욕을 하고
오늘 일정을 다시 한번 체크한 다음
8시부터 식구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고독한 미식가에 나온
팥토스트집 까페가 9시에 문여니까
빨리 일어나서 준비해라 빨리!!!!"
나를 제외하곤 모두 느린 아침이라서
내가 하는 말이 잔소리 성화라며 질색팔색
하는데 특히나 여행지에서는 나도 모르게
인프제 초특급 각성이라 정도가 심한 것 같다.
느려터진 식구들을 깨우고 입히고
부랴부랴 나선 시간이 8시 50분
나는 까페 앞 대기줄이 길게 늘어섰을까
마음이 초조하다.
그런 내 마음과 달리 식구들은
"그깟 팥토스트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으려고?"
"맞아 아침부터 잠도 못 자고 이게 뭐야?"
라며 궁시렁 궁시렁 거리며
느시렁 느시렁 걷고 있었다.
못 들은 체 하고 당도한 까페에는 이미
9시 전부터 대기하는 손님이 있어
우리 차례는 서너 번째 정도였다.
"참 아침부터 대단들 하다 정말"
집사람이 하는 소리는 먼저 와서 줄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소리인데 나까지 싸잡아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한다.
나고야 팥토스트 까페
까페 주인은 9시가 되자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순서대로 입장을
시키고 주문을 받는다.
일본의 까페는 흡연이 가능한 곳이 많은데
우리가 찾은 까페도 그런 곳이라 실내는
담배 냄새가 쿰쿰하게 배어 있었고
옛날 느낌 인테리어라 우중충한 가운데
다닥다닥 작은 테이블과 의자에
몰려든 손님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각자 주문한 커피, 차 그리고 토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편한 냄새와 인테리어, 높은 밀집도 그리고 기다림이란 환경은 아침에 짜증을 못 다 푼 아이들에게 적절한 스파크가 되어 터지기 시작한다.
"아 뭐 이런 데를 왔어?"
"냄새도 나고 난 안 먹을래"
'뭐어?'
나니까 찾은 나름 유명한 곳인데 말이야
어떤 덴지도 모르고 이것들이 정말
아빠는 슬슬 삐짐 모드 ON을 켠다.
우리 주문 차례가 와서
더듬 더듬이지만 일본어로 주문을 해본다.
"고레 히또쯔또 고레 후따쯔또......."
초보 외국어를 목청껏 말하는 사람을 드물터라
나 역시 조그만 목소리로 이거 하나 저거 두 개
이렇게 저렇게 주문을 마쳤는데
마스크 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집사람의
눈빛은 비아냥 그 자체였다.
삐짐에서 분노로 옮아간 감정은 어느새 끓기 시작해 그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리기 시작한다.
"아 왜?
왜 웃는데?" 라며 웃음의 정체를 확인하니
"아니 일본어 그렇게 연습하고
맨날 일본 유튜브 보더만 주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거 하나 이거 두 개
결국 그렇게 하는 거야?"
비아냥거리는 눈빛 아래 마스크에 가려 보이지
않는 입에서 퍼져 나오는 소리에
끓는 분노에 달그락 거리던 뚜껑은 날아갔고
감정 주파수는 널을 뛰기 시작했다.
나는 화가 나면 말을 안 하는데
그 길로 나는 입을 닫고 커피와 토스트가 나오자마자 사진이고 뭐고 그냥 꾸역꾸역
먹고 마시고는 계산을 치르고 나왔다.
까페 내부 옛날 느낌이긴 하다
당시 내 심정은 더 이상을 여행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숙소에서 성내면서 하루종일 있고 싶었지만
돌아가는 비행기는 삼 일 후이고 숙소도 차를 운전해 두 시간 넘게 가야 하는 곳이라
어쩔 수 없이 운전대를 잡았고 여정중독증세에
렌트카의 목적지는 영화 촬영지 저택으로 찍고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다들 달라진 나의 기류를 눈치채고
덩달아 조용해진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오가는 방향이 다른 일본 고속도로에서 한참을 했다.
'그래 쏟아내고 기분 털고 여행하자!'
하는 생각에 적막을 깨고 신들린듯한 방언을
내뱉기 시작한다.
아빠가 여기 와보고 여정을 짰겠냐?
거기가 그렇게 담배냄새가 많이 날줄 알았냐?
고독한 미식가에 나온 곳이라 유명한 데니
데려가보려고 한 거 아니겠냐?
아빠 혼자 이런저런 궁리해 가면서 만든 여행 일정인데 아쉬움이 있더라도 괜찮네 좋네 맛있네 하면서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니냐?
아니면 니들이 짜던가 대안은 없고 불평만 하면
되겠냐?
나의 타박은 의문문이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의 방언이 마치자
갈등의 상대였던 집사람이 그 대척점 사이로
나와서 상황을 정리하려 한다.
"그래 너희들도 아빠가 이렇게 준비했는데
고맙습니다 하고 따라다녀야지 그러면 안돼!"
조수석에 앉아서 뒷좌석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의 분노를 통역하지만
정작 분노 유발 장본인인데 유체이탈화법을
쓰고 있어 운전대를 잡은 나는 다시 말했다.
"그리고 말야
그렇게라도 주문해서 시켜 먹은 게 어디냐?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큼 유치한 일이 없겠지만 그때 난 그랬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짠 여정에 지장 없이 여행을 마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미안해 알지 알아 잘못했어"
집사람의 사과를 받고 아이들도 여행에 불평 않겠다는 약속을 듣고 나서야
냄비 안 분노는 식기 시작했고
그제야 멀리 우뚝우뚝 솟은 산 꼭대기에 녹지 않은 눈도 보였고 바로 옆이 바닷가인 것도 알았다.
그 이후로는 여정에 대해서는 다들
칭찬일색이었다.
볼거리 많았던 수족관도 즐거웠고
뷔페식 저녁과 아침이 포함된 숙소의 가성비가 최고여서도 그럴 테지만
아빠가 서운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데 대한 경각심도 있었을 테다.
곧 여름이라 또 다른 여행의 기회가 있을 텐데
지난 여행의 감정을 되살리면서
내 욕심을 버린 여정만이 갈등 없는 가족여행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