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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던컨 Oct 27. 2023

어쩌다 공인인증서를

육회덮밥과 금치산자


"프로님 오늘 점심 약속 있으십니꽈?"


점심시간 30분 전 혼밥 위기에 처한 동료 K가 메신저를 보내왔다.


나는 점심시간에 운동 가려고 알찬 과일 도시락을 싸왔지만 K의 SOS에 둘이 점심을 먹자고 나섰다.


K와는 둘이서만 식사를 한 적 없는 사이지만

모임 자리에서 얘기해 보면서 나와 비슷한 상황임을 알게 되어 얼마나 많은 공통점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K는 결혼 10년 차에 접어든 아들 둘의 아빠인데

커가는 아이들의 육아문제와 양립하기 어려운 직장생활로 힘들어하는 배우자와 최근 들어

티격태격하는 갈등이 잦다고 말했던 터라 사람 사는 게  똑같구나 싶었다.


점심 장소는 미동식당이라고 서소문 아파트 상가에 있는 곳인데 동경 뒷골목의 선술집 분위기였다.  

육회덮밥 유케동을 주문하고는

우리는 각자의 가정생활, 부부생활에서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찾으려 애썼다.



K는 2년 간의 연애 후 결혼을 했는데 결혼 당시 명확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똑 부러지는

성격에 반해 결혼했던 배우자가 이제는 소녀같이 잘 삐지고 또 자주 화내는 모습으로 변해서

어렵다고 했다.   


나 역시  우유부단한 성격을 배우자의 남다른 추진력과 실행력으로 보완이 될까 싶어서 결혼을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내 성격과 정반대라서

어려운 점이 많다고 맞장구를 쳐줬다.


점심을 먹고 회사 근처를 걸으며 각자의 사례를 들어가며 좀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는데

K의 배우자는 언니만 세 명이라서 언니들로부터 전수받은 남편조리에 대한 온갖 노하우를 장착하여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토로했다.


나는 어떤 화답을 할까 하다가 제일 후회되는 게 신혼 초에 공인인증서를 아무 생각 없이 집사람에게 줘버린 거라고 말했는데

옆에서 걸으며 내 말을 듣던 K는 내 말을 듣

입을 벌리고 놀라 이내

눈썹을 한껏 내리고 콧구멍을 벌리

'아 이 형도 나랑 같네'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그랬다.

K도 세 언니들의 남편조리 테크닉을 숙달한 배우자의 가스라이팅에 공인인증서를 일찌감치 제출하고 나서 나와 같은 처지였었다.


점심시간 복잡한 서소문 인도에서 공인인증서가 없는 40대 아저씨 둘은 서로만 공감하는 주제로 그렇게 뜨거운 악수와 포옹을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네 얘기가 나의 얘기인양 서로에게 빙의되어

단지 공인인증서 상실인 줄 알았던 게 만든 가정 내

주도권 상실과 그로 인해 돈문제에 대해서 배우자에게 애걸복걸하는 우리의 포지션이

남일이 아니라며 위로하기 시작했다.


K는 도발적 이게도 지금이라도 공인인증서를 내놓으라고 할까 싶기도 한다라고 했는데 나는 아서라 그걸로 괜한 싸움을 더 만들고

그로 인해 피곤해질 일상을 생각해 보면

그냥 이렇게 금치산자로 사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타일렀다.


그렇게 바보 아저씨 둘의 수다는 한 시간 반을 훌쩍 넘기고서야 잦아들었고 각자의 자리에 앉은 우리는 다음에 있을 바보 뽐내기 기회를 기약했다.



feat. 미근동 미동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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