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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쉬잇 May 13. 2022

깐깐한 안경의 까탈스러운 부장님과 사직서

이럴 거면 공유 파일에 사직서 양식 없었으면…

이건 아니다. 정말 이건 아니다. 몇 년 전 이직을 위해 면접을 본 후 합격하여 설레던 그 회사가 지금은 굉장히 불편해졌다. 나만의 독립적 업무 공간이라 생각했던 파티션은 누구나 똑같은 크기로 공장에서 복사하듯 찍어낸 관과 같이 내 몸에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며 항상 똑같이 올리는 결재 서류는 모바일로 하는 금융상품 신청과 같이 몇 번을 해도 끝나지 않는 서명만 줄기차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지 않고 거친 싸구려 수의 같은 직물 시트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서 실행에 옮길지는 미지수지만 진지하게 사직서 제출을 생각한다. 작성부터 제출까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야 회사나 나에게도 뒤탈이 없으니 이렇게 시간을 내어 생각하는 것도 업무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용히 지켜보던 부장님이 다가와 “김사원은 점심시간에도 사직서 생각하면서 쉬지를 않는구만!” 하며 어깨를 토닥이지는 않는다. 아니다. 그냥 내 근처에 오지 않으셨으니 오히려 좋다. 우선 사직서를 작성 후 어떻게 제출할지가 문제다.




첫 번째, 사직서를 인쇄 후 서명을 한 뒤 결재판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는 부장님에게 간다. 깐깐하게 생긴 직사각형 렌즈의 안경을 반쯤 내리고 나를 올려다보는 까탈스러운 부장님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 의자를 가지고 옆에 앉아보라고 한다. 그러고는 입을 열고 말씀을 하신다.


“김사원, 잘하다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건가? 면접 볼 때 포부가 굉장해서 내가 상무님 설득해서 합격시켰는데 실망이구만. 김사원 올해 몇 년 차지?”


“2년 차입니다.”


“그래, 곧 승진도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해야지. 어떤 업무나 직장을 알게 위해서는 적어도 3년은 해봐야 하는 거야”


이 정도 듣다가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나는 부장님에게 정중히 안경을 달라고 말씀드린 후 받자마자 반으로 쪼개고 그냥 사무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상상를 한다. 첫 번째는 그만 알아보자.


두 번째, 미리 짐을 정리하고 사직서를 인쇄 후 서명을 한 뒤 봉투에 넣고 자리에 앉아계신 부장님에게 간다. 그리고 부장님께 사직서가 든 봉투를 드린다. 부장님이 봉투를 받자마자 난 자리로 돌아가서 짐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선다. 허나 눈치 빠른 부장님은 사직서를 내밀자 바로 받지 않고 난 올려다보며 “이게 뭔가? 의자 가지고 옆에 앉아보게”라고 말씀하신다. 일단 받아야지 가능한 이야기라 두 번째도 그만 알아보자.


세 번째, 부장님이 퇴근하시고 난 후 자리에 사직서만 올려놓는다. 하지만 이 방법은 현실성이 가장 없다. 부장님은 절대 먼저 퇴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야근까지 하며 십자말풀이를 하고 있으면 업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부장님께서 그러신다는 게 아니고 혼잣말이다. 정말이다.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만 하다가 점심시간을 날리고 말았다. 울리는 전화기와 밀린 관계사 메일로 인해 머리가 아파진다. 부장님이 관계사와 통화 중인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난 입이 두 개가 아니라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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