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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쉬잇 Jun 28. 2022

나만의 라쇼몽

평소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특정 배우나 작가, 감독에게 빠지면 그들과 관련된 모든 작품을 찾아보는 경향이 있다. 감독으로는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가 그렇다. 감독 최고의 작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는 1분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라쇼몽”이라고 말할 것이다. 일본 헤이안 시대의 어느 사무라이가 죽은 사건 중심으로 같은 사건임에도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의 엇갈린 진술을 두고 각자의 입장과 시각, 이해관계를 담은 것이 영화의 간단한 시놉시스이다. 자세한 내용은 영화를 보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더는 말하지 않겠다. 작품의 수상이력과 유명세를 제쳐두고 오로지 작품성으로만 봤을 때도 어느 하나 모자란 부분이 없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제목인 “라쇼몽”은 사회 용어인 “라쇼몽 효과”로 각자의 입장과 이익에 따라 상황을 달리 해석하는 현상으로도 불린다.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도 답답한 마음에 앞에 앉혀놓고 혼을 낼 만큼 공부와 일찍이 담을 쌓았던 (담이 아니라 댐이라고 할 정도였다. 후버 대통령께는 죄송하지만 후버댐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내 이름 석자 하나 쓸 줄 모르는 우리나라 하위 1%의 문맹이었다. 글을 모르니 당연히 책을 읽을 수 없었고, 수업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그런 바보 천치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선생님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4학년 2학기 가을 때 겨우 한글을 뗐다. 그와 거의 동시에 국어 교과서에는 시가 나왔다. 시를 읽고 쓰는 수업에서 선생님은 내키지 않지만 나에게도 창작 시 숙제를 내주었다. 주제는 가을이었다. 미루고 미루다 숙제 내는 날이 다가오고 반 친구들은 줄을 서서 한 명씩 공책을 들고 검사를 받았다. 숙제를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줄까지 서지 않아 선생님의 눈에 들어오는 순간에는 숙제를 안 한 죄와 줄을 서지 않은 괘씸죄로 두배로 혼날 것 같아 줄을 서긴 섰다. 적당히 혼내시다가 말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나보다 먼저 줄을 서 숙제를 안 했다고 말하는 친구의 손을 30cm 자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교실 벽에 기대어 4행의 짧은 시를 재빨리 쓰고 초조한 마음으로 순서를 기다렸다.



가을이 왔다


가을이 왔다.

빠른 사람들은 긴 팔이었고

느린 나는 반 팔이었다.

왠지 나만 외톨이가 된 것 같다.



기다리는 동안 앞 뒤의 친구들은 “이야 이렇게 짧고 허접한데 통과는 되겠어?”라거나 “선생님! 얘 숙제 방금 했어요!” 같은 말로 계속 놀리기만 했다.  ‘방실방실 내리는 단풍잎’ 같은 제목을 붙인 친구의 시가 더 허접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보다 몇 배는 많은 분량이라 비교가 됐다. 나는 히터도 틀지 않은 가을 교실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고 선생님은 내 공책을 유심히 보더니 그대로 두고 가라고 하셨다. ‘역시나 며칠을 놀다가 방금 숙제를 한 괘씸죄로 공책까지 뺏긴 게 분명해’라는 걱정으로 자리에 돌아가 다리를 떨었다. 검사 시간이 끝나고 선생님은 내 공책만 주지 않았다. 무사히 통과하여 안도감에 말이 많아진 아이들을 보고 선생님께서 구리로 만든 일명 ‘합죽이 벨’을 두 번 치셨다. “합죽이가 됩시다. 합!”이라는 반 친구들의 구호 아래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 시를 낭송했다. 낭송이 끝난 후 “이게 진짜 ‘서정시’야!”라고 칭찬하셨다.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날 놀리던 친구들은 “이야 길다고 좋은 게 아닌가 봐!”, “잘 썼다고 했잖아!” 같은 사탕 발린 말을 쏟아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까와 상반된 친구들의 말과 태도에 마음 깊은 곳에서 찝찝한 감정을 느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영화 “라쇼몽”을 제작할 때까지만 해도 영화사와 제작사 사장들은 세트 제작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거나 제작비를 줄이라는 독촉과 영화의 내용이 이해가 어렵다며 불평만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영화가 개봉한 후 각종 상을 휩쓸자 “내가 없었으면 이거 만들기라도 했겠어?”라고 말하며 생색 내는 것을 보고 “이것이 진정한 라쇼몽 그 자체”라는 말을 남겼다. 인생의 경험과 배움의 깊이는 다르지만 초등학교 4학년의 나도 “라쇼몽 그 자체”를 느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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