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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쉬잇 Jul 06. 2022

신념 없는 오보 베지테리언

오래전, 평소와 같이 아침에는 돈가스 카레, 점심에는 돼지 국밥, 저녁에는 껍데기 집을 간 다음날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겨 어릴 적 내 아토피를 말끔히 치료해주신 적이 있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다. 부끄럽게도 나만 사라진 아토피 대신 이상한 반점을 달고 찾아온 것뿐, 의사 선생님의 모습은 입술이 연분홍색 대신 보라색이 되신 것 빼고는 어릴 적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선생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갑자기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겨서 왔습니다. 아 맞다, 잘 지내셨죠?”


“그래, 우선 봐야 하니까 여기 앉아봐”


등받침 없는 익숙한 원형 의자에 앉아 반점이 생긴 등을 보여드렸다. 사실 등보다는 가슴팍이 더 심했지만 얇은 흰색 티셔츠를 입기 위해 붙인 니플 패치가 보일까 봐 부끄럽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니 더 심한 곳을 봐야지 다른 곳은 의미가 있냐며 약간의 꾸중을 하시고는 등만 보며 진찰을 보셨다. 등을 활짝 내보이고 진찰을 받으면서도 사태 파악이 덜 된 나는 분명 어제 하도 돼지고기만 먹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신들의 음식에 손을 댄 치히로의 부모님처럼 덩치 큰 핑크색 돼지로 변하기 전 초기 증상일 수도 있겠다는 반쯤 농이 섞인 망상을 하였다. 잠시 후, 선생님께서는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여쭈셨다. 솔직하게 어제 먹은 것을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읊으니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항상 먹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며 한 동안은 그런 육식 위주 식습관은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큰 충격에 “선생님, 그럼 저는 무엇을 먹어야 하나요?”라고 순식간에 환자에서 진상으로 변하는 이상한 질문을 하였다. 그런 엉뚱한 질문에도 인자한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며 좋은 것을 많이 먹으라고 하신 후 ‘언니’라는 코드네임의 간호사분을 불러 나에게 양쪽 엉덩이 주사 두대를 선물로 주셨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반점이 사라지지 않아 난생처음 한의원을 찾아가서 체질 검사를 했다. 한의사 선생님께서는 워낙 몸에 열이 많고 독소가 가득 차서 식습관을 모조리 바꾸지 않는 한 잘 낫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나는 또다시 “선생님, 그럼 저는 무엇을 먹어야 하나요?”라고 멍청한 질문을 하였다. 한의사 선생님께 마찬가지로 웃으시며 우선 한번 계란을 제외한 육식을 끊어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거의 미트테리언에 가까운 인생을 살았던 나는 그날 이후로 비건의 전 단계인 계란과 채식만 하는 ‘오보 베지테리언’이 되었다. 다행히 지금은 반점도 사라졌고, 살아보니 그런 식습관에 적응해서 지금까지 오보 베지테리언으로 살고 있다. 다만 신념으로 하는 채식이 아닐 뿐만 아니라 마음은 아직 잡식성(거의 육식성)이 남아있으니 다른 베지테리언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은 부끄러운 감정이 든다. 그렇다고 미트테리언을 만나면 마음만 육식성이니 반대로 늑대 흉내를 내는 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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