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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토프 Dec 31. 2021

오늘이 몇일이죠?

식탁 위에 놓인 작은 시계는 모든 소리가 잠든뒤에야 초침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제야 들을 수 있다. 오늘은 뭐라도 써야 할 것 같아 식탁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초침이 다급한 건지, 내가 다급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내 나이가 몇인지 잊고 사는 나에게 12월 31일은 큰 의미가 없는데 말이다.


오랜만에 집에 있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카페에서 지인들을 만나 한 시간여 수다를 떨었다. 그 한 시간이 얼마나 값지던지 나는 하루 종일 들떠있었다. 수다를 끝내고, 방학식으로 짐이 많은 둘째 아이와 귀가해보니 남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셋째가 힘들게 한 것은 아니라는데, 남편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내가 오자마자 베란다 정리를 시작한 남편은 일을 마치고 나서도 여전해 보였다. 나의 우울함은 익숙한 일이지만, 이 남자의 우울은 언제 보아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저녁이 되어서야 나에 혹시 할 말이 있는 거냐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무표정에 도리도리뿐.

그러다 불현듯이 떠올랐다. 스물아홉 그때도 이러했다. 서른 즈음에 노래에 푹 빠져 서른 앓이를 하더니, 이번엔 마흔 앓이.

나는 첫째를 키우느라 혼이 나가서 그때도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겨우 서른 살이 된 것 가지고, 나이를 엄청 먹은 것처럼 구는 게  저럴 일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다르다. 지인들이 겪는 마흔 앓이는 대단했다. 꽤 오래갔다. 12월 31일이 남편에게 마흔 앓이를 선물했다. 그런데 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



나는 요즘 거의 매일 술을 마신다. 많아야 한 캔, 적으면 반잔이지만, 오후 6시쯤 시원한 목 넘김이 떠올라 아이 밥을 먹이며 한 모금 두 모금 홀짝거린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3월이면 셋째도 어린이집에 가는데, 내가 견딜 수 있는 한계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느낌이다. 18개월은 괜히 18개월이 아니다. 잘 시간이 되어서 자자~한마디 했을 뿐인데, 자고 싶지 않은데 자자~라고 해서 아이는 30분을 목놓아 울었다. 고작 18개월인데 말 한마디에 지옥을 맛보게 하는 아드님을 모시고 있다. 어린이집 원장님께 아이의 신호를 잘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두 아이는 그러지 않았는데, 남편조차도 내가 둔해진 게 아니라, 셋째의 신호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어제는 맘마 먹어야지를 따라 하더니, 오늘은 외출하고 돌아온 나를 보며 엄마 어딨어를 말했다.

고작 18개월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너는 또 얼마나 독특할까.

첫째가 받아온 통지표에 '평범함을 거부하고 위트 있고 재치 있게'라는 평가가 있었다. 첫째는 본인은 평범함을 '거부'한 적이 없는데, 선생님께서 잘못 알고 계신다고 했다. 그럼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고, 창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는 매일같이 혼나고, 반항하고, 울고. 제대로 된 아홉 살 인생을 살고 있는데, 통지표엔 내 딸이 아닌 아이가 적혀있었다. 쓸 수 있는 칭찬은 다 쓰여있는, 대단한 평가였다.

재미없는 인생이 될 뻔한 나에게 웃으라고 이런 독특한 아이들을 주신 걸까.



얼마 전에는 길러온 긴 머리를 과감히, 겨우 묶일 정도의 단발로 잘랐다. 나에겐 그 마저도 사치였다. 사치인걸 알면서도 버텨 보았지만, 셋째에게 무릎 꿇었다. 그러고 나니 작고 반짝이는 귀걸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볼품없어진 나에게 뭐라도 하나 더 붙여서 반짝이게 하고 싶었다. 아이가 30분씩 울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오늘 아침엔 간절기에 입을 옷을 결제했다. 한겨울인데, 꽃샘추위에 입을 생각을 하며 이 옷은 내 옷이다 주문을 걸었다.

마흔 앓이 하는 남편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히 옷장 속으로 넣어야 하는데, 조마조마하다. 혼자 신나 있는 걸 들킬까 봐.


내년에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몇 일인지,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다행이다. 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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