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들어놓는 마흔이라 그런지, 12월 연말이라 그런지, 집에 2주 넘게 대답조차 하지 않는 동거인 때문인지 툭하면 눈물이 나는 나를 달래주는 건 망상과 글쓰기이다. 달래준다기보단 도피처랄까. estj에게 망상이란 아주 큰 현실 속에 아주 작은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서라도 희망을 엿보는 거 같아 짜릿하기도 하다.
마흔에 일탈이라고 해봤자 소원풀이 한번 하겠다고 혼자 이동욱(오빠라고 붙여 쓰고 싶지만 거리두기)을 보고 온 게 전부였다. 이번달에 얼마나 더 자유시간이 주어질지 모르겠고, 나간다 해도 맘이 편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혼자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의학에서 보기에 그리 건강한 방법은 아닐 거 같기도 하지만 현실도피를 위해서 나는 또 상상한다.
세상에 남사친이 한 명만 허락된다면 그게 바로 이동욱(오빠)였으면 좋겠다. 지금은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니지만 남사친의 존재는 없다. 아니 꽤 오랜 시간 전부터 없었다. 그것이 안된다면 내가 배우가 되어서 소속사식구가 되어볼까. 그리곤 거울을 들여다본다. 만 12세 아들과 다니면 엄마가 정말 맞냐고 엄마가 맞다고 해도 누나 아니냐고 의심하는 얼굴이긴 하지만 배우가 될만한 상은 아닌 것 같고. 연기를 공부하고 실력이 좋아진다 하더라도, 과연 내가 진흙탕 속에서 입으로 코로 진흙을 먹어가며 연기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역할만, 고생하지 않는 작품만 선택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닐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배우가 되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쉽게 나왔다.
그럼 5년 동안 쓰고 쓰고 또 써서 극본을 만들어볼까. 내가 작가가 되어서 주연으로 캐스팅하고 만나는 건 어떨까. 아, 나는 경험이 없지 배경지식도 없고 기껏해야 남편욕이나 쓰다가 끝날 것 같은데...
아 그럼 다시 패션디자인공부를 하고 스타일리스트로 지원해 볼까. 아 내 감각도 나이를 먹을 텐데 어쩌지.
후광 비치던 아들은 전혀 연예계에 관심이 없으니 아쉽지만 패스. 아이브 좋아하는 둘째 꼬셔서 아이돌 생각 있으면 스타쉽오디션에 지원해 보자고 할까. 나보다 애들이 소속사식구되는 게 더 빠르겠네.
그렇게 혼자 일주일정도 망상에 빠져 머리를 굴리다가 엊그제쯤 정신을 차렸다. 5년. 앞으로 5년 동안 나는 독립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것이 이혼인지 경제적 독립인지 확실한 건 없지만 주체적인 삶을 위해서 준비하는 기간으로 생각해 두었다. 우선, 매일 거울을 보고 이 열개를 보이며 웃는 얼굴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웃지 못하게 만든 그 사람이, 사진 속에 희미한 미소의 나를 보며 비웃는 꼴을 이제는 이겨내야 하니까. 그래야 나도 사진 속에서 활짝 웃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매일 쓰기로 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볼 것 없는 끄적임이더라도 쓸 거다. 수많은 문장 중 내 글 하나가 누군가의 글감이 된다면 그 또한 기쁘고 값진일이 될 것이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