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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토프 Sep 09. 2024

미술학원

일곱 살의 수정 - 2

아빠 회사 근처에 있는 상가들을 재빨리 훑었다. 내가 다닐 만한 학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오기 힘든 시간에 아빠 회사 근처에 있는 학원이라도 다니면, 아빠가 퇴근 후에 나를 데리러 오지 않을까. 그럼 5일 중에 적어도 이틀은 내 손을 잡고 집에 가서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다!!!"


"수정아~ 어디 가는 거야~~"


미술학원을 찾아냈다. 시작이 좋다. 일곱 살에도 그림을 곧잘 그리던 내게 미술학원은 내 능력밖의 일도 아니었고, 내 계획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지였다. 엄마라면 분명, 집에서 그려도 될 걸 굳이 왜 미술학원에 가려고 하냐고 할 게 뻔했다. 아빠를 잡고 늘어져야 했다.


"아빠! 나 저기 미술학원 다니고 싶어~ 집에서만 그리는 것도 재미없단 말이야. 나도 언니들처럼 병도 그리고 컵도 그리고, 꽃바구니도 그리고 사과도 그리고 잘 그리고 싶어."


"그런 건 좀 더 커야 그릴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집이랑 너무 멀지 않겠어?"


"아빠가 데리러 오면 되지~ 갈 때는 엄마가 데려다주고."


동생손을 잡고 뒤늦게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도착한 엄마가 묻는다.


"무슨 일이야~ 뭔데 이렇게 떼를 쓰고 있어."


"수정이가 저기 미술학원을 다니고 싶다네. 녀석이 나 닮아서 그림을 잘 그리잖아. 언니들처럼 잘 그리고 싶대."


"여긴 너무 먼데. 미정이까지 데리고 수정이 여기 데려다주기도 힘든데 집에는 어떻게 데리고 와."


"아빠랑 같이 집에 가면 되지~ 아빠 6시에 일 끝나잖아. 나 데리고 집에 같이 퇴근해~아빠~~~ 제발요~~ 이번 크리스마스에 나 인형 안 사줘도 되니까 미술학원 보내주세요~~~~"


너무나도 무뚝뚝해서 새침데기에 장녀가 아니라 장남으로 불리던 내가 살아생전 안 해 본 콧소리를 내고, 팔을 잡고 몸을 비비 꼬며 매달리니 아빠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배우고 싶다고 한 적도 없는데, 내일 학원에 전화라도 해봐~"


"별일이네. 피아노 학원은 그렇게 귀찮아하면서 이 먼 곳까지 다닐 생각을 하고."


엄마도 반쯤 넘어온 것 같았다. 일단 내일 유치원을 다녀온 후에 엄마를 좀 더 설득을 하기로 했다. 엄마를 설득하는 건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유치원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밤새 유치원 생활을 기억해 내느라 뒤척였다. 다음 날, 나는 동생 손을 잡고 엄마와 함께 유치원으로 향했다.


"예수정 너 이상하다?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응?"


"학예회 준비하느라 힘들어서 그래?"


학예회. 내 인생 통틀어 제일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훌라춤도 춰야 했고, 무언극에서 아가씨도 연기해야 했고, 독창무대도 있었고. 대표로 인사말도 해야 했다. 요즘 같은 세상이면 엄마들이 왜 한 아이한테만 분량을 많이 주냐고 우리 애는 왜 무시하냐고 유치원 전화가 불이 났을 거다. 나는 그 많은 역할을 맡고 있었고, 엄마는 다른 엄마들에게 선생님한테 돈을 쥐어준 거냐며 약간의 시기와 질투를 받고 있었다. 다행히도 내 몸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정아~ 그래 그거야. 어머 너는 춤도 이렇게 잘 추니~"


마흔 먹고는 듣기 힘든 칭찬을 오랜만에 들으니 기분이 참 좋았다. 숨겨져 있던 내 인정욕구가 다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어깨가 으쓱해져서 공주님처럼 걸어 다녔다.


"수정이 어머님~ 수정이는 정말 스펀지 같아요. 춤도 한번 알려주면 습득도 잘하고, 친구들한테도 얼마나 잘 알려주는지 제가 다 고맙다니까요~어머님이 한 춤 하시나 봐요~"


"아니에요~ 제가 낳았는데 저도 신기하다니까요. 저희 집엔 아무리 봐도 이런 피가 없거든요. 아기 때부터 그렇게 마이크 잡고, 춤추고 그러더니 다르긴 다르더라고요."


선생님과 엄마가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그들의 이야기를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까 봐 긴장했나 보다.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니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춤을 얼마나 췄으면 저러니. 어휴"


"그런 거 아니야~~ 엄마는 왜 칭찬을 안 해줘? 나 오늘 진짜 잘했는데."


"선생님이 칭찬 많이 해주셨겠지."


"치. 미술학원은 전화해 봤어?"


"응. 일곱 살은 2시부터 오면 된다던대."


"안돼~~~ 나 4시 거 갈 거야~~ 그래야 아빠랑 집에 오지~"


"4시는 큰 언니들 다니는 시간이 던대."


"나 피아노학원 끝나고 4시에 미술학원 가면 딱이잖아~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은 그렇게 할래~~~~ 다시 전화해서 물어봐줘 엄마~~ 응?"


"아휴 지겨워. 그럼 네가 전화해서 물어보던가."


세모눈을 하고 엄마를 째려보았다. 엄마와 동생을 뒤로하고 먼저 집으로 뛰어갔다. 집전화기 옆에 미술학원 전화번호가 쓰여있었다.


"네 미술학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일곱 살 예수정인대요. 저희 엄마가 아까 전화하셨었거든요."


"아~ 네가 수정이구나?"


"네, 선생님 근데요 제가 꼭 4시 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안될까요? 저 놀이터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 바다에서 즐거웠던 하루 이런 거 그리는 거 시시하거든요. 저도 언니들처럼 물건 그리고 싶어요."


정물화 혹은 소묘라는 말을 쓰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최대한 어린이의 언어를 쓰려고 노력했다.


"하하하. 너 엄청 당돌하구나. 너 그림 잘 그리니? 그림도 과정이 있어서 수준이 늘어야 그런 그림도 그릴 수 있거든."


"그럼 제가 그리는 거 한번 보고 정하실래요?"


"그래~ 좋아 이따 엄마랑 미술학원에 와볼래?"


그렇게 테스트를 잡아놓고는 엄마와 학원으로 갔다. 엄마는 나를 데려다주고는 동생과 함께 학원 근처 놀이터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나는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저기 걸려있는 그림 중에 수정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어?"


"네, 저거요."


난 주저 없이 장미꽃이 가득 담긴 꽃바구니가 그려진 소묘를 가리켰다.


"저건 연필로 그리는 건데, 입체를 표현해야 하는 거라 너한테는 어려울 수도 있어. 이걸 먼저 그려볼까?"


선생님은 사과가 그려진 종이 한 장을 보여주시면서 똑같이 그려볼 수 있겠냐고 하셨다. 명암은 없고, 형태만 그려진 사과였다. 매일 드레스를 그리고, 종인인형의 옷도 직접 만들어서 놀만큼 열심히 그리며 살던 나에게 그림자가 있는 사과는 내 능력밖의 일이었지만, 형태를 따라 그리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다. 보여주신 그림의 사과의 크기를 연필로 재가며 내 종이에 옮기고 짧은 선을 여러 번 그어 긴 선으로 연결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선생님은 깜짝 놀라신 게 분명했다.


"어떻게 연필로 잴 생각을 했어? "


"티브이에서 봤어요. 종이 세워놓고 그림 그리는 큰 언니들이 연필로 이렇게 하더라고요. 궁금해서 아빠한테 물어봤더니 아빠가 알려주셨어요."


"그랬구나. 너 제법이다~ 그림 그리는 거 진짜 좋아하는구나?"


"네, 저 매일매일 그림 그려요. 종이인형 옷도 제가 만들 수 있어요!"


선생님과 상담을 하기 위해 엄마가 학원으로 돌아왔고, 나는 엄마를 붙잡고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 학원비 깎지 마."


열두 살 무렵, 방학에만 미술학원을 보내주겠다 허락했던 엄마는 그마저도 돈이 아까웠는지, 그 정도로 집에 돈이 없었는지, 학원비를 깎아내고서야 나를 학원에 보냈다. 그 학원에서 내가 배운 건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그려야 할 과제를 내어주고는 한 시간 내내 커피만 마셨고, 완성된 내 그림을 보고 잘했네~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생 언니들 수업을 곁눈질로 보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입시공부만 하다가 의상디자인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엄마가 그 시절 학원비를 깎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는 그 미술학원에서 유일하게 방치된 아이였다는 걸 인지했다.


"매일 그리더니 천재 소리를 듣네. 선생님이 너보고 천재래."


"아빠 닮아서 그렇지~그럼 나 4시에 와도 된대?"


"응~신기하다니까 손재주는 엄마 안 닮아서 다행이지. 너 근데 학원비는 왜 깎지 말라고 한 거야?"


"엄마는 엄마가 선생님인데 학원비 깎으면 기분 좋겠어?"


엄마는 점포도 없이 새벽에 나와서 물건이 다 팔릴 때까지 자리 잡고 앉아있는 할머니들 물건은 제값 주고 잘 사면서, 멀끔한 점포에서 파는 과일이나 채소는 일단 말도 안 되는 값을 부르고 흥정에 들어갔다. 그때마다 나는 멀찍이 서서 엄마의 딸이 아닌냥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도 그 정도의 용기는 나지 않더라. 그 시절의 엄마들은 그 정도의 용기가 기본설정값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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