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어머니~, ㅇㅇ이는 야무지고 똑똑해서 좀 더 큰 기관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소근소근)
23개월부터 입문한 가정형 어린이집을 1년쯤 다녔을 때였다. 정기 상담 시간이 끝나갈 무렵 담임선생님께서 원장님 몰래 나에게 속삭이셨다. 여기 가정형 어린이집 보다는 조금 더 큰 곳에 가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 아이는 훨씬 더 성장할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원을 옮겨도 아이가 성향상 잘 적응할 거라는 말과 함께.
선생님의 이 조언은 ‘그렇구나! 우리아이는 역시 남달라~’ 라는 세상의 모든 엄마가 하는 착각을 내게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나는 매우 급.하.게. 규모가 꽤 큰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같이 있는) 기관으로 아이를 옮기게 되었다. 원래는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옮겨 간 기관은 건물이 두 개나 되는 규모였다. 그래서인지 잘 짜여진 시스템과 커리큘럼을 갖췄고 훈련받은 선생님들이 커리큘럼 안에서 부지런히 움직이셨다. 등원 첫 날 내 아이는 인생 처음으로 다른 아이한테 맞고 오는 불상사를 겪었지만, 이후에는 비교적 원에 잘 적응하였다. 가까이 사시는 친정 엄마가 아이의 등하원을 맡아주셨고, 궂은 날에는 친정 아빠가 라이드도 해주시면서 아이는 그렇게 돈 벌러 회사 다니듯 대우를 받으며 잘 다니고 있었다. 아이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는 하원하고 집에 왔을 때인데, 가방을 던져놓고 퇴근한 아빠처럼 누워 TV를 보는 것이었다. 잠시 모든 생각을 멈추고 머리를 식히는 가장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웃지못할 풍경이었다.
일년쯤 되던 어느 날, 이번에는 내가 문제였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고 보니 나는 무언가 좀 더 특별한 교육을 해주고 싶었다. 내게 선택지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숲 유치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교원이었다. 숲 유치원은 주입식 교육과 경쟁으로 얼룩진 나의 어린시절을 보상해 줄 것만 같았다. 매일매일 숲에 나가 자연과 같이 놀고 미술로 표현하는 방식은 아이의 영혼을 얼마나 자유롭게 할 것인가. 숲에서 마냥 뛰놀고 뒹구는 아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였다.
다른 하나는 맘카페에서 강력히 추천받은 선교원이었는데, 목사님 사모님이신 원장님은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들을 매우 따뜻하게 케어해준다고 하였다. 크리스챤인 나는 따뜻한 분위기에서 아이가 안정감을 갖고 찬양도 배우고 기도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고민하고, 이제 제비뽑기로 결정해."
두 종류의 유치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고민하다 머리를 쥐어뜯어 대머리가 될 지경인 나를 보다 못한 친한 언니가 건넨 말이었다.
'지금 이렇게 중요한 사안을 겨우 제비뽑기로 결정하라고?'
누가 들으면 너무 생각없이 던지는 조언이 아니냐고 뭐라 할 지 모르지만, 사실 언니는 나보다 훨씬 마음 따뜻하고 신앙 좋은 사람이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제비뽑기가 있다.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이 계시고, 또 성경말씀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그러니까 언니는 죽을 듯이 고민하는 내가 너무 보기에 안쓰러우니, 차라리 기도하고 제비뽑기라도 하여 하나님께 맡겨보라는 의미였다.
그만큼 당시의 나는 유치원 하나에 아이의 온 미래가 걸려있는 듯한 부담으로 고민을 했다. 지금껏 내 인생만 결정하고 책임지면 되었는데, 내가 아닌 아이의 인생을 결정해주어야 한다는 게 그렇게 부담이 될 수 없었다.
15년차 워킹맘이었던 나는 일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일이었다. 워킹맘의 운명을 엄마가 찰떡같이 받아들였으니 자동적으로 아이의 정체성도 ‘워킹맘의 아이’였다. 엄마가 워킹맘이기에 아이가 느끼는 부족함이 있다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한 마디로 아이를 케어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 때문에 아이를 맡아줄 기관을 선택하는 일이 내게는 너무나 중요했다. 엄마와 집을 대신해야 하니까.
23개월 때부터 기관에 다녔는데 다섯 살 나이에 세 번째 기관을 고민하는 것이니 1년에 한 번씩 갈아치우는 셈이었다. 기관이 바뀔 때 아이가 감당해야 할 변화에 대한 스트레스는 안중에도 없었다. 유치원, 초, 중, 고를 모두 한 동네에서 나온 내게 ‘전학’이라는 단어는 국어어사전 속에 누워있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는 뭘 잘 모르니까’ 라는 엄청난 무식함이 나에게 무한한 과감함을 안겼다.
그렇게 치열한 고민의 결과로 아이는 선교원에서 세 번째 기관생활을 하게 되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만들어 줄거라 믿었던 숲유치원을 뒤로 한 이유는 그 때 즈음 미세먼지에 대한 뉴스가 하루가 멀다하고 보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크리스챤으로서 선교원이라는 환경이 아이의 영혼육을 건강하게 해주리라는 믿음이 조금 더 있었다.
감사하게도 아이는 선교원에서도 적응을 잘 했다. 하나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어미는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선생님들은 따뜻했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으며, 때때로 친정부모님의 손을 빌리지 못할 때에는 선생님께서 그 자리를 메워 주시기도 하였다. (글을 쓰다 보니 새삼 감사하다.) 아이가 종종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이 되었다. 어느 날은 “엄마, 내가 선교원에서 오후에는 다리가 무거워져요.”라고 하였다. 원에 너무 오래 있다보니 마음과 몸이 지친다는 표현이었다. 그 때에도 나는 마음이 쓰리고 아팠지만 그 놈의 ‘워킹맘의 아이’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아이는 선교원을 다니며 어느 덧 6살이 되었고, 내년에는 선교원에서 최고 형님반이 된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떠날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무려 두 번이 더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