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부족함 없이 그리고 평범하게 무난하게 잘 살았을 것만 같은 나는 어느 순간 우주의 순리로 인해 결국 20대에 들어섰고 모든 게 새롭고 자극적이었고 뭐든지 해낼 것 만 같은 열정다움이 나를 촉매제 작용을 일으켰다. 동시에 나의 깊은 무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란 나뭇가지가 내 머릿속에 끝없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정말로 솔직히 그 어떠한 것도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만 않은 세상이라는 현타감을 느끼니 매 순간마다 고달팠다. 뭐가 그렇게 고달팠을까?
3살 때 열병으로 후천적으로 청각을 잃고 산지 어엿 25년, 100세 시대에 아직 넌 젊었어, 청춘이다라는 소리를 듣는 나이지만 나는 늘 두려웠다. 정말 조건 없이 사랑해 주는 아빠엄마,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왔지만 마음 한구켠에는 채워지지 않은 고달픔이 늘 달고 다녔다. 뭐가 그렇게 고달팠을까?
5살 때까지 보청기 없이 지내다가 어린이집에 보낼 나이가 되니 부모님은 집에 있는 돈 없는 돈을 마련해서 생일 때 제일 좋은 귀속형 보청기를 선물로 주셨다.
“하린아... 앞으로 더 좋은 소리를 들으라고 아빠엄마가 주는 거야"
처음 보는 물건이었고 모형도 신기했었다. 보청기를 착용하니 조용했던 세상들이 하나둘씩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그때 새도 자기만의 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적응하는 중 아빠는 우리 딸이 사회에서 기죽지 않게 하겠다는 그 교육마인드로 일반학교를 보냈는데 거기에서 나는 적응은커녕 늘 혼자였다. 친구들은 말이 어눌하다는 이유로 친하지 않았고 내 귀에 있는 보청기를 보면서 “우리 엄마가 너랑 친하지 말래"라는 말까지 들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중국어수업이었다. 중국어는 매번 강의시간에 받아쓰기하는 게 고통스러웠다. 이유는 받아쓰기하면 제일 많이 틀리는 게 나였다. 틀린 경우 방과 후까지 틀린 단어를 20개씩 작성하고 가는 게 벌칙이었기 때문에 중학교 졸업 때까지 반 친구 중 내가 제일 늦게 집에 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때마다 혼자 걸어서 집에 가는 그 순간엔 국어선생님이 너무 미웠고 나 자신이 너무 짠하고 고달팠다. 안 들려서 많이 틀렸는데 그게 뭐가 그리 서럽고 뭐가 그렇게 고달팠는지 그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회적 민감성과 인정욕구가 강한 아이가 고등학교 때까지 늘 혼자였고 고등학교 때는 3년 동안 심한 왕따 경험까지 있어서 정신적으로 내가 힘들었고 나 스스로를 얼마나 고립시키고 위축됐을까 싶었다. 그깟 장애가 뭐라고... 내가 만일 농인학교를 다녔더라면 이런 경험이 없겠지 하고 희망적이고 심심찮은 위로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더 악으로 버텼던 것 같다.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언어치료를 받고 잘 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 가봐 소속에서는 더 긴장상태를 늦추지 않고 지금까지 지내왔다. 정말로 존버해오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얼마 전 오랜만에 고등학교동창을 만났다. 그리고 소정이의 소식도 함께 들려줬다. 잊을 줄만 알았던 그 이름, 왕따가해자의 이름이었다.
“소정이 이번 달 결혼한대. 듣기론 잘 사는 집안 남자를 얻어서 결혼한다고 들었는데 웨딩사진 봤는데 이쁘더라"
웨딩사진 속의 소정이의 웃는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그냥 멍해졌다. 3년 내내 보청기 낀단 이유로 엄청난 괴롭혔던 소정이가 행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망치로 탕 때린 느낌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고 열심히 아등바등 살아왔는데 가해자는 알아서 행복해하면서 살고 있구나. 그깟 네가 뭐가 잘났길래."
순간 걸어왔던 내 인생이 너무 벅차게 느껴졌고 힘들고 고달픈 게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보통이라도 하려 해도 보통이상의 엄청난 노력과 에너지에 애쓰는 것에 질렸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얼마나 더 고달파질까 대한 두려움도 몰려온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살아가는 내 인생의 고달픔도 언제쯤 평안해질까 싶다.
복잡 미묘한 내 마음과 달리 밤하늘의 별은 너무 반짝거린다. 이만 쓰고 맥주나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