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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 pire May 06. 2024

무의식

라깡은 "그것ça이 말한다"는 문구를 자주 씁니다. 

그것ça, 여기서 그것ça은 바로 무의식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의식이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을 신비한 것이나, 초월적인 어떤 것이나, 몽환적인 것이나, 낭만적인 것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용어였지요. 그런데 프로이트와 라깡이 말하는 무의식이란 그런 낭만적인 것이 아닙니다. 무의식이란 거칠게 말하면, “관념의 연쇄”입니다. 



  “의식의 상태는 대단히 일시적인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지금 의식적인 관념은 잠시 후에는 그렇지 못하다. 물론 그것이 일정한 조건 [...] 에서는 다시 의식화될 수 있지만 말이다. 그 사이에 그 관념은 존재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모르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그것이 <잠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말은 그것이 어느 때이고 <의식화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서, 그것이 <무의식적>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것에 대해 정확한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아와 이드,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열린책들 349쪽 



  정신분석가들의 유일한 스승인 프로이트의 말을 살펴봅시다. 의식의 상태는 일시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의식한다는 것은 바로 지각에 의존한다는 것이지요. 지각이라는 것은 감각기관(눈이나 코나 입이나 귀)을 통해 받아들인 감각데이터를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과정 자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지각이라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지요. 가령 김치찌개 냄새가 좋았다가도, 감기에 걸리거나 하면 불쾌한 냄새가 될 수 있지요. 지금은 좋은 것이어도, 잠시 후에는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각에 의존하는 의식적 관념은 프로이트의 말처럼 “일시적”입니다. 

  반면에 무의식은 관념의 연쇄, 생각들의 사슬입니다. 김치찌개에 대해 일관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생각은 의식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있지요. 그 일관된 생각의 흐름, 바로 그것이 무의식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은 밑바닥에 흐르고 있으니 “잠재적”이고, “의식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프로이트는 이미 무의식에 대해서 밑바닥에 잠재되어있는 관념의 연쇄라는 정의를 해놓고 있지요. 관념은 언어로 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자기 혼자 생각에 잠겨서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면, “관념적”이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무의식은 이처럼 혼자 생각의 사슬을 풀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말하고 있을 때에도, 그 의식의 아래쪽에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에 구멍이 뚫릴 때, 의미체계의 흐름이 끊기고 단절될 때, 그때 무의식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걸 "말실수"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의식의 형성물이지요. 그런데 프로이트의 말처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모르고 있을 따름”이지요. 

  따라서 라깡이 “무의식은 언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정의를 더욱더 간명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요약한 것임이 드러납니다. 

  라깡을 읽다보면, 그가 프로이트를 얼마나 추앙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후기 라깡은 프로이트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만… 일단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충실했다는 점은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무의식은 환상적이거나 몽환적이거나, 혹은 빙산의 일각처럼 저 밑에 숨어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념의 연쇄, 생각들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와 같은 구조를 가집니다. 그것ça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으며, 자기에 대해서 고집하고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과정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그것ça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학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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