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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은달 Apr 23. 2024

2023년 2월 18일의 하루


어차피 일찍 일어날 거면서 왜 한 번에 일어나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겨울이라 그렇다. 해가 너무 늦게 떠서 그렇다. 아니면 말고.


아침엔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단호박 인절미를 마저 먹었다.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의 <죽음에 대하여>를 읽었다. 인간은 합리적은 사고를 하기 위해사 저렇게나 많은 가정, 저렇게나 많은 예시가 필요하구나, 니체처럼 아포리즘으로 말하면 도무지 알아먹지를 못하는구나, 싶었다. 영혼도 없고 사후세계도 없고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업보도 없고 심판도 없다. 죽음은 말 그대로 죽음, 모든 것의 끝이다. 이런 말은 아쉬울 수도 있고, 후련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속세의 죗값을 연옥에서 치르지 않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세상이 그런 법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아침부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전히 우리 가족들은 서울에서 시끌벅적하게 살고 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들의 고성과 웃음 때론 신음은 해프닝처럼 느껴진다. 활극처럼 느껴진다. 나는 왁자지껄함에서 파생되는 고통을 안다. 살냄새를 풍기며 생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다. 사람들은 내가 고독을 즐긴다고 지레 짐작한다. 나는 고독을 즐기지 않는다. 되려 누구보다 고독을 무서워한다.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닥쳐오는 고독은 외로움보다 지독하다. 그 독함알기에 이 먼 시골에서 혼자 사는 것이다.


엄마와 통화를 마치고 반려견 사랑이와 집을 나섰다. 사랑이를 미용실에 맡기고 근처 가게에서 도넛 4개를 사고 카페에 들렀다. 카페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다. 읽는 중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 메모를 하느라 책은 60여 페이지 밖에 읽지 못했다.




엊그제 브런치에 쓴 글이 갑자기 유행을 탔다. 기쁜 일이다. 허무한 일이다. 그래도 좋았다. 글을 잘 쓴다는 칭찬 댓글이 달렸다. 나는 내 글 솜씨를 알아서 그 칭찬이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글을 쓰는 일에 원동력을 얻었다. 내가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세상이 반응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죽지 않을 이유가 되었다. 오늘 하루 살 이유가 되었다.


좀 더 필력이 좋았으면 좋겠다. 문장은 더 잘 읽혔으면 좋겠고 단어들은 더 적절했으면 좋겠다. 메시지는 더 보편적이었으면 좋겠고, 이야기는 더 독창적이었으면 좋겠다. 헤밍웨이나 도스토예프스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을까? 대문호, 그거 어떻게 되는 건데? 궁금하다. 나만의 길이라는 게.



카페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딸기 생크림케이크를 먹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하나 먹었다. 음식의 특별한 맛은 없었다.


간단히 집안일을 하고 TV를 보았다. 다음엔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빌려 읽어야겠다. 날이 흐려지고 몸도 노곤해져서 강아지와 함께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2시간 정도 일어나고 나니 지난주의 피로가 가신 느낌이 들었다. 일어나자마자 아침에 샀던 도넛을 하나 먹었다. 이까짓 게 200칼로리가 넘다니, 불공평하다.




다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마저 읽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으면 사람은 살 수 있다.'

'왜 사는지 알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 수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처절한 고통에서 작가가 얻은 교훈이다. 나는 만성 기아 상태도 아니고 발이 항상 동상에 걸려 있지도 않다. 매일밤 이에 뜯기지도 않고, 추위에 잠 못 이루지도 않는다. 계단을 오르지 못할 만큼 기운이 없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죽고 싶다. 그림 그리듯 죽음을 떠올리고, 치밀하게 살인을 계획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찾는 일. 그게 신이 나에게 주신 마지막 과제인 걸까.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싶지 않고, 그렇게 튀게 살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이런 삶이 계속될 바에야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실제로 죽고 싶은 것이 아니다. 본심은 살고 싶다.


2월 15일부터 방문 앞에 메모지를 붙여놓고 오늘 하루 죽고 싶었는지 살고 싶었는지 '바를 정자'를 그리며 카운트를 하고 있다. 2월 18일인 오늘 작대기를 셈해보니 죽고 싶다에는 작대기가 하나뿐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만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는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수감 생활을 마치고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나는 그저 하염없이 누워있고 싶으면서도 매일 수많은 일들을 한다.



이게 진짜다. 나는 많은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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