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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은달 Mar 04. 2023

증명해 내는 삶

언행일치의 삶


지난주에 쓴 글 중에 '증명'과 관련된 키워드로 쓴 글이 어제 갑자기 지붕킥을 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증명에 지쳤다는 반증이다.


나는 증명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정욕구가 있고 표현의 욕구가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그러니 사랑해 주세요! 칭찬해 주세요!'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것이 인간이다. 칭찬받고 싶어 열심히 일하고 사랑받고 싶어 다정히 지내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증명해내고 싶은 마음이 그릇된 것이 아니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잘못된 것이다.



우리 시대의 증명이 잘못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증명의 목표 설정 오류이다.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간은 기계화를 요구받았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만큼 일하고 정해진 일을 실수 없이 완료하는 인간이 최상의 인간으로 취급받은 것이다.


존재 가치로서의 인간보다 도구로서의 가치가 더 높게 평가받는 사회. 오로지 필요와 쓸모만으로 평가되는 세상. 말 그대로 인력시장의 인간들이 매대 위에 올려져 상품처럼 거래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는 컴퓨터를 살 때 그것이 컴퓨터라는 존재의 이유만으로 구매하지 않는다. CPU가 어떻고 RAM이 어떻고 그래픽이 어떤지 사양을 꼼꼼하게 따진 뒤에 구매한다. 요즘 시대에 하물며 인간에 대한 처우는 어떤가. 외국어는 할 수 있는지, 컴퓨터는 얼마나 잘 다루는지 관련 자격증은 더 없는지 꼼꼼하게 따진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인간인지가 중요하다.




인간 증명의 목표 설정이 잘못된 마당에 두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도구로서의 인간을 증명할 방법도 마땅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의 쓸모 이력서 한두 줄, 자격증 사본으로는 증명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도구와 동일한 방식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 왜냐면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다 보면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난다. 지금 내가 다니는 직장의 동료는 괴팍하지만 꼼꼼하다. 이런 사람들은 타인과 소통하며 업무를 진행시키는 일에는 젬병이다. 툭하면 말다툼이 일어나고 일이 산으로 간다. 대신 문서를 교열하고 예산회계를 맞추는 일에는 제격이다. 이런 사람은 공무원 업무 중에서도 계약과 관련된 업무를 맡으면 좋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동료는 축산기사 자격을 가진 농업직이다. 내가 일하는 지자체는 조례에 따르면 농업직은 예산회계과로 발령받을 수 없다.


여기서 내 직장 동료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2가지다. 안 맞는 일을 억지로 하며 생계를 꾸리거나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것이다.


주변에 이런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하는 증명이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그 일을 하는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잘하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하는가>와 같은 실존주의적 질문이다.


자신에 인생에 단 한 번도 스스로 답을 해본 적이 없으니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인생이 물음표이다.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서,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자격증을 따고, 남들 다 가는 회사에 들어가서, 남들처럼 결혼해서 살고.


남들처럼 살고 있는데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그 사이에 남들은 또 저만치 달아나 있고, 내 인생인데 '나'는 쏙 빠져있고, 이제와 나답게 살아보자니 책임이 양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나도 자기 계발서라 하면 징글징글하게 읽었다. TED, 세바시, 유명하다는 강연도 찾아들었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좋은 말들도 많았지만 뭐 하나 내 인생에 제대로 접목시키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그냥, 내 멋대로 산다. 내가 납득시켜야 할 사람도 내가 설득시켜야 할 사람도 결국은 나지, 결코 남이 아니다.




서른 개의 바큇살이 모여 하나의 수레살통을 이룬다. 수레살통에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수레의 쓰임새가 있게 된다.


진흙을 빚어서 그릇이 만들어진다. 그릇에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릇의 쓰임새가 있게 된다. 문과 창문을 뚫어 방이 만들어진다. 문과 창문 안에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방으로서의 쓰임새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유()’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무()’는 쓰임새가 있게 한다.

- 노자, < 도덕경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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