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1장 - 어사일럼(asylum)과 광인
미국 영화나 만화 같은 것들을 보면, 간혹 ‘어사일럼(asylum)’이라는 장소를 보게 된다. 스릴러나 공포 장르의 배경으로 자주 나오는데, 보통 우리나라 자막에서는 ‘정신병원’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어사일럼과 정신병원은 분명히 다른 곳이다. 역사적으로 동양 문화권에는 어사일럼이 없었는 데다가, 정신병원과 정신과 환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번역가들이 이 괴기스러운 '어사일럼'이라는 단어를 ‘정신병원’으로 번역하는데 별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영어로 옮기자면 정신병원은 말 그대로 ‘mental hospital’이며, 어사일럼(asylum)은 병원이 아니라 수용소나 요양원, 더 정확히는 '치료감호소'에 해당한다. 현대에는 사라진 어사일럼에서, 심한 착란이나 광란, 분노발작을 보이는 심한 조현병이나 조울병 환자들에게 의학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환자들이 흥분하여 발작을 일으키면, 묶어 놓거나 춥게 만드는 정도의 치료(?)를 가했고, 구타도 많았다. 20세기 초에 저혈당 쇼크요법이나 전기경련요법, 뇌수술이 등이 시도되었지만, 치료적 이득에 비해 부작용이 훨씬 컸다. 그리고 1950년대가 되어서야 지금과 같은 약물 치료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사일럼은 근대 유럽의 도시들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정신병자들 뿐 아니라, 노숙자, 알코올 중독자들, 그 밖에 방탕한 사람과 불경한 사람들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강제 수감되었다. 그리고 군대나 형무소에 담당 의사가 배치되듯이, 어사일럼에도 의사가 있었다. 군대나 형무소의 의사가 구성원들의 복지와 퇴소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처럼, 어사일럼의 의사들도 입소자들의 치료를 목적으로 근무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광적인 발작과 소란을 통제하며, 사망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어사일럼과 중세의 정신의학에 대한 계보를 되짚으며, 과연 인간이 타인을 ‘광인(狂人)’이라고 규정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사유한바 있다. 푸코의 복잡한 철학과 사유를 모두 요약,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간단히 말하면 그의 의도는, 현대 ‘광기’ 라는 단어(기호)는, 권위주의 사회의 ‘억압’과 '통제'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근대 유럽에서, 자본주의와 산업화, 도시화와 인구밀집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각 도시에 어사일럼이 창궐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어사일럼에 수용된 사람들의 대다수는 의사가 병자로 진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다양한 노숙자들과 빈민, 알콜중독자들 뿐 아니라,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일하지 않는, 방탕한 이들도 치안 경찰에 의해 수감되었다.
의료인이 아닌 경찰들이 직관적으로 결정하여 입원시킨 이 부류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이상한 행동 때문에 눈에 띄면서' 동시에,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과거 육체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귀족이거나 성직자들 뿐이었다. 가난한 도시의 거주민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루 종일 중얼거리거나, 취해있거나,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사람들은 다른 구성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들을 강제로 격리하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하지만 도대체 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중얼거리거나 취해있거나 소리를 지를 뿐 아닌가? 물론 그들이 그러다가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고 결핵이나 영양실조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죽게 내버려 두거나 자비롭게 구휼하지도 않으면서, 일반시민들로부터 특별히 격리하여 감금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세금으로 압도적이고 거대한 건축물(어사일럼)까지 세워가면서 말이다.
산업혁명 이후, 수많은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며 산업화를 이룬 유럽에서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 말라’는 말을 인용하며, 금욕적인 청교도의 직업 윤리가 자리잡았고, 시민들 역시 이러한 사조를 받아들였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므로 군소리 없이 일하라. 방적기를 돌리고, 염색 공장에서 화학 약품에 손을 담그라, 탄광으로 기어 들어가라, 나무를 베고 곡식을 수확하라.
그러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대다수들이 보기에, 깨어 있으나 일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혼돈에 빠져있는 부류의 인간들은, 상당한 불쾌감을 유발시켰다. 지배계층이 보기에는, 노동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있음에도 전혀 지배계층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험한 반자유주의자의 씨앗과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피지배 계층이 보기에는, 자신들은 이미 체제에 순응하여 고되게 일하고 있는데, 그와 달리 일하고 있지 않은 자들이었다. 자기 자신들도 먹고 살기 힘든데, 그들에게 공적으로 음식을 나누어 줘야한다니 더욱 분하다. 질투와 혁명정신은 무의식으로 억압되었고, 우리 노동자들은 정상이며 저런 무위도식하는 놈들은 '광인'이다라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경직되고 강압적인 권위에 순종한 구성원들이, 그러지 않는 구성원에게 분노하는 것은, 현대에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신이 속한 비합리적이고 경직된 구조에 적응하고 나면, 신입 구성원의 저항은 괘씸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권위적이고 가혹한 상사로 인해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관습적 복종에 순응하지 않는 신입사원을 보며, ‘저 개념없는 어린 신입이 감히 우리 부장님께? 회장님께? 교수님께?’ 하는 식으로 분노를 느낀다.
즉 근대 유럽 도시의 억압된 피지배 계층의 서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순종적인 생활 방식을 따르지 않는 이단아들을 비난하기 위해 ‘광인’이라는 기호가 필요했다. 지배계층도 이에 동조하여, 어사일럼이라는 거대하고 권위적인 성채를 만들어, 이들을 특별히 격리, 감금하여 살려두었다. 그렇게 어사일럼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틈틈이 고양시키는 권위적 상징이 되었다.
19세기 말, 근대 자연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생리학과 심리학, 정신의학이 탄생하면서, 이들 ‘광인’에 대한 전문적인 구별과 진단이 이루어졌고, 정신과 환자들에 대한 인도적인 대우와 치료를 제공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조현병’, ‘조울병’, ’치매’, ‘경련성 질환’ 등에 대해 정신병리학 연구와 개념 정립, 분류가 이루어졌다. 1950~60년대가 지나면서 효과적인 치료, 즉 투약 만으로 환청이나 망상을 감소시킬 수 있게 되었고, 70~80년대의 정치사상적 진보 과정에서는, 장기 정신과 입원환자들에 대한 사회복귀와 탈원화가 권장되었다.
하지만 '광기', '광인', '어사일럼'에 대한 편견과 대중들의 잔인한 투사는, 한시도 사라지지 않았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그리고 21세기가 되어서도, 여전히 정신병원과 정신병 환자에 대한 음산하거나 괴이한 이미지는 다양하게 재생성되어 소비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정신병동과 환자들의 모습을 가장 현실적으로 그려낸 영화는 잭 니콜슨 주연의 1975년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이지만, 사람들은 끔찍한 '연쇄살인마'가 감금되어 있거나, 괴이한 생체실험을 가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정신과의사의 본거지로 사용되는 정신병원을 훨씬 더 선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