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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진 Mar 21. 2024

뉴로티피컬의 신화

아스피 부록(1) 관계의 파국 후에는 꼭 복기를 해보자

친구나 직장 동료가 나한테 화를 냈다면,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가 파국을 맞게 되었다면, 

꼭 나중에라도 그 과정에 대해 복기해보자. 그 사람은 그 때 왜 나에게 화를 냈을까?      


* 파국: 어떤 일이나 상황이 잘못되어 완전히 깨어짐

* 복기: 경과를 검토하며 처음부터 다시 순서대로 해봄      


아스피가 경험하는 대인관계 갈등은, 몇 가지 패턴으로 나뉜다.      


* 갈등: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서로 생각이 달라서 다투거나 분노하게 되는 것     


1) 일방적으로 비난을 받고, 관계를 단절하거나 학교 혹은 회사를 그만 둠.

     i) 그리고 자책: 내가 그렇지 뭐. 

     ii) 아니면 분노: 난 사람들이 정말 싫다. 세상이 싫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 등.     


2) 일방적으로 비난을 받은 후, 법적 혹은 제도적 대처. 고소, 고발, 진정, 공식 항의 등.      


뉴로티피컬에게 ‘대인관계 갈등’이란, (누가 이기던 간에) 서로 불만을 드러내고 원망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 감정들은, 공중으로 떠오르는 두 줄의 연기처럼 자욱하게 공간에 어지럽게 흩어지며, 얼마동안 남아 있다가 서서히 사라져간다. 서로를 대할 때마다, 작업 메모리에 남아있는 서로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작동한다. 서로 화를 내며 싸울 수도 있고, 아니면 한쪽이 참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분노는 감정 그 자체로서 한동안 지속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보유한 분노는, 여러 형태로 주변의 지인들에게 전파되고, 공감 받는다.  

 

하지만  아스피는 타인에게 사소한 일로 분노하지 않는다. 아스피에게 분노는 진정한 의미의 생물학적인 ‘위험 신호’이며 '도구'다. 상대에 대한 분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위기가 해소되면 분노도 사라진다. 


분노 자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들어가는, 인간의 정상적인 감정이며, 반드시 느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감정들 중 하나다. 


화를 내든 참든, 내가 화가 난 것을 다른 사람이 알든 모르든, 분노는 항상 우리 인생에 존재한다. 분노의 강도는 상황에 따라, 날씨에 따라, 내 신체와 뇌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가령 1점부터 100점까지의 사이에서 분노의 강도를 분류할 수 있겠는데, 아주 약한 형태의 '삐짐'에서부터,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할 정도의 분노, 울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달려들고 때리는 폭력성을 드러낼 정도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사람이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대부분 합리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가 합리적이며 타당하고 합목적적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다른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원인으로 인해 화가 나는 것이며, 그 분노로 인해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다는 착각을 한다. 예를 들면 가격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 받지 못했거나, 불법적으로 자신의 유무형의 재화를 탈취당하는 경우, 혹은 범죄에 희생 되었을 때만 분노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현대 인간의 분노는, 대부분 오해와 사소한 감정적 욕구, 입장 차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신체적 혹은 심리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발생한다. 그리고 분노는 결과적으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크다.  


가령, 배고픈데 음식을 빨리 구할 수 없을 때, 그리고 어렵게 구해 먹은 음식이 맛이 없을 때 화가 나고, 내가 피곤하거나 외로운데 타인이 나를 위로해주지 않을 때, 같이 놀고 싶은데 바쁘다고 할 때도, 강도는 낮지만 화가 난다. 

     

친구나 연인과의 다툼, 부부 싸움, 부모-자녀 간의 다툼에서, 소위 '공감'이나 '성격차' 운운하며 화를 내는 이유들도 대부분 사소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감적 지원을 얻고 싶을 때, 자신의 사연을 어느 정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집해서 말한다. 특히 뉴로티피컬은, 정서적으로 친밀해진 관계가 될 수록, 상대방에게 더 많은 정서적 욕구를 갖게 된다. 위로 받거나 공감 받고 싶어지고, 무조건적인 동의나 격려를 받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받지 못하면 화가 나거나 우울해지게 된다.   


자녀 양육 방침이나, 재산 관리 방식, 진로 결정 문제 등 중요 결정 때문에 논쟁하다가 다투기도 하지만, 이 부분도 제3자들이 보기에는 애매하거나 양쪽 다 일리가 있고, 성숙한 노년의 입장에서 보면 젊었던 한때의 열정이거나 객기이기도 하다. 노인들이 보기에 이런 불화는, 지나고 보면 부질없는 사소한 집착이고, 무릇 사람이란 건강한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할 따름이지만, 이런 생각은 젊은 시절에는 불가능하다. 


어쨌든 분노는, ‘폭력’이나 '죄악'의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둘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친밀한 관계일 수록 가끔은 서로의 의견이 다르거나 오해가 생겨서 오히려 다툴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절대 싸우지 않거나,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불만을 정상적인 범위 안에서 잘 표현하고, 혹은 사과하는 것이다.      


하지만 특히 한국인들은, 이 분노라는 감정을 다루는데 취약해서, 의견 대립이나 논쟁을 처리할 줄 모르고, 침묵 아니면 폭언, 순종 아니면 절교라는 극단적인 패턴을 보인다. 서양인들은 흔히 ‘화내지마’ (don't be angry, calm down)라는 말을 자주 쓰며, 상대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상대가 화를 내면 같이 폭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각자 관습적인 도덕률에 근거하여 서로를 비난한다.   

     

다시 말하지만, 뉴로티피컬의 분노란, 매우 사소한 정서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그들의 분노의 표현 방식이 옳은가, 그르냐는 판단하지 말자. 원래 그들에게는 그런 습성들이 있다. 인간의 분노는, 트림하거나 방귀 뀌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아스피의 분노는, 실제 자신에게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발생한다.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손해가 발생할 것 같을 때, 혹은 누군가 나에게 ‘너는 규칙을 어겼다’고 판정할 때 발생한다. 규칙 위반은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스피의 분노는 곧 ‘행동’으로 전환된다. 법률에 대한 자문과 인터넷 검색, 실제의 고발이나 진정으로 이어진다.  

    

혹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자책이나 자기 비난을 한다. 이런 경우 의식적으로는 내가 잘못했다거나 내가 못나서 그렇다는 생각을 반복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자신의 구체적 습성에 대해 분석하지 못한다.       


뉴로티피컬들의 분노 감정 표현과 공감이라는 구조를 모르기에, 아스피는 조직에서 누군가 자신에게 화를 내면, 그 상황을 물리적 공격의 수준으로 체감하며, 최악의 위기 상황까지 상상하여 대비한다. 가능한 현실적인 구체적 대응책을 마련하며 많은 정보를 수집한다.      


하지만 그들이 화를 낸 이유는 사소한 것이며, 그들이 화를 냄으로써 얻으려는 목표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목적 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나요?’ 라고 묻는다면 맞다. 분노 폭발은 현실적으로 경제적 이득이 없고 오히려 손해인 경우도 많지만, 뉴로티피컬들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다. 분노 뿐 아니라, 즐거움이나 슬픔도 가능하면 타인에게 표현하고 공유한다.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화를 낼 때 쓰는 언어들의 의미가 부조리함을 알아야 한다. 뉴로티피컬들이 화가 났을 때 쓰는 언어들에는, 비현실적, 비합리적, 즉흥적인 내용들이 무척 많다. 가령, 남자들이 싸울 때 간혹 ‘너 죽는다!’ 라고 소리 지르기도 하는데, 이럴 때 아스피는 정말로 신변의 위험함을 느끼고 경찰에 ‘살인미수’와 ‘협박죄’로 신고를 하겠지만, 당연히 고발 접수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스피는, 경찰의 공무 태만으로 추가 진정을 넣을 수도 있다. 농담을 이해 못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타인의 분노와 협박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심한 공포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가상의 카톡 대화이다.     


나: 너가 어제 말한 그 드라마 어디서 볼수 있어?

친구: 야 너는 왜 맨날 말하는게 그러냐? 존나 짜증나 

나: 내가 말하는게 왜?

친구: 뭐 니가 필요한 것만 물어보냐? 내가 검색엔진이냐? 

나: 너가 어제 말한 그 드라마 어디서 볼 수 있는지 물어보는건데 왜 그래? 

친구: 아, 관둬. 너 진짜 그런 식으로 살지마라.      


여기서 내가 친구가 화가 난 이유를 알 수 없으면, 곧 내가 방금 한 말에서 어떤 잘못이 있는가 찾게 되고, 과거에 내가 한 말들에서도 비윤리적인 부분이 있는지를 찾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친구 사이에 지켜야하는 대화 상의 어떤 예절이라던가 규칙이 있는 것인지 연구할 것이고, 친구에게 궁금한 것을 여러번 물어보는 것이 정말로 무례한 것인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친구가 갑자기 화가 난 이유는, 사실 아무도 정확히 알수 없다. 그냥 이 카톡 직전에 다른 사람 때문에 화가 난 것을 분풀이한 것일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 항상 객관적인 질문만 할 뿐, 친구의 사생활이나 마음 상태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의 누적일 수도 있지만, 아마 그 방아쇠 역할은 다른 곳에서 왔을 것이다. 그 다른 곳이 어디냐는 것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분노는 비합리적이며 즉흥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구의 분노가 자신의 규칙 위반을 징계하기 위한 물리적 공격이라고 상상하게 되면, 아스피는 규율을 검색해본 후, 억울함과 방어 심리를 갖게 될 것이다. '도대체 갑자기 나한테 왜 저러지?' 하고 혼란스러워지며, 오히려 마지막 줄에서 자신의 생존을 부정한 친구야말로 부도덕하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친구가, 자신의 외로움이나 정서적 욕구가 해결되지 않는 분노를, 때마침 나에게 폭발시킨 것일 뿐임을 이해한다면, 좀더 유연하게 대처가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나는 잘못이 없고, 내게 화를 낸 너가 잘못한 것이니, 우리는 절교’라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미안해. 내가 어떤 점을 고쳐야할 지 말해주면 노력해볼게’ 라는 공감적 반응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의무는 아니지만, 고도의 스킬임과 동시에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것은 친구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느날 직장 상사가 화를 내며 ‘이럴 거면 때려 쳐!’ 혹은 ‘그냥 관둬!’ 라고 소리를 지른다면, 이것은 대부분이 감정 표현의 방식일 뿐인데, 아스피는 ‘지금 저 해고하시는 건가요?’라고 물어본 후, 스스로 사직하거나 부당해고로 노동청에 진정하거나 실업급여를 신청할 것이다.     


뉴로티피컬 상사들이 화를 내는 이유도, 대부분 자신의 욕구 불만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자기 소유의 업체나 자신의 실적 압박, 혹은 최고위직자로서 존중 받고 싶고 권위를 과시하고 싶은 욕구의 좌절에서 비롯된다. 혹자는, 하급자의 근무 능력이 미숙하기 때문에 화를 내야한다고 그들의 분노의 합목적성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어떤 전문 분야에서 태움을 당하며 수련을 쌓아본 사람이라면, 신입 시절, 호되게 야단맞은 경험이 자신의 성장에 필수적이었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지금 자기 자신이 하급자들에게 표현하는 분노에 대한 합리화일 뿐이다.      


누구나 처음 배울 때는 서투르게 마련이고, 반복되는 실수와 교정 후에는 서서히 능숙해지게 된다. 한국인들의 선입견과 달리, 학습이나 발달 과정에서 효율적인 방법은 긍정적 강화(잘했을때 칭찬)와 부정적 강화(항상 칭찬하다가 못했을때 칭찬 안함)이다. 즉, 자기 자신의 보람과 만족감, 성취감, 대외적인 격려나 칭찬이 행동 수정 효과가 더 크지, 야단 치거나 화내는 것(처벌 요법)은 효과가 좋지 않다. (이것이 구금이나 징역이 재소자들의 재범 방지에 효과가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외향적인 뉴로티피컬 인턴 사원 A 와 아스피 인턴 사원 B가, 똑같이 10번 실수했는데, A는 혼이 나지 않고, B는 더 자주 심하게 혼이 날 수 있다. 그 이유는 B의 무표정이나 침묵이 야단치는 상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야단을 쳤을 때 보이는 뉴로티피컬 표정 변화나 짧은 언어 반응이 없기 때문에, 상사는 B가 자신을 무시하거나 미워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뉴로티피컬 사수가 신입을 야단칠 때, 사수는 자신의 불안과 정서적 욕구에서 비롯된 분노 외에도, 이 분노로 인해 신입으로 부터 미움을 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소위 말하는 ‘예쁨 받는’ 뉴로티피컬 신입들의 비결은, 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 완벽함이 아니라, 정서적 공감과 반응 능력에 있다. 혼날 때는 기가 죽은 표정을 적절히 수행하며, 야단 맞은 후에 심하게 우울해 하지 않고, 사수에게 이전과 같은 친밀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공감과 공감적 반응은, 도덕적 의무는 아니다. 사회적인 기술 혹은 스킬일 뿐, 그것이 더 뛰어난 인간성인 것도 아니다. 단지 외국어 능력이나 프로그래밍 실력, 각종 자격증 보유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아스피가 원한다면 이러한 기술을 조금씩 증가시킬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지금부터, 최근에 겪었던 갈등 그 사건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맹목적인 자책이나 편집적인 원망에서 벗어나서, 최근 있었던 사건부터 더듬어보자. 반성하거나 사과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만 둔 조직으로 되돌아가라거나, 화해를 종용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공부해보는 것 뿐이다. 누군가 내게 화를 냈을 때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면, 나는 불안하면서도 억울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다보면 서서히 내 마음 속에서 상상하는 세계는, 아무 이유 없이 나를 해치려는 괴물들의 세상처럼 느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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