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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진 Mar 13. 2024

뉴로티피컬의 신화

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14장 - 증오의 덫을 넘어 


만약에 여기까지의 내 글이 합리적이며 신용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면, 

지금 내가 제시하려는 한 가지 가치를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비유하자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바탕화면에 깔아주는 정도면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비’, ‘아가페’, ‘보살심’, ‘인류애’, ‘인간애’ 등이라고 불리는, 

‘다른 여러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물론, ‘자비’ 혹은 ‘인류애’는 도덕적 가치이며, 의무가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자비'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이기도 하다. 이타성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만족을 느낀다. 전 세계, 전 시대에서, ‘선행’이 도덕적 가치로 희자될 수 있는 이유는, '문화'의 힘과 더불어, '선행' 그 자체가 인간의 선천적 본능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말이 있다. 숨겨진 우물에 대한 마음이라는 고사성어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보이지 않는 우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면, 악한이라고 해도 이를 막아줄 것이라는 뜻이다.      


찻길로 뛰어들 뻔한 아이를 보호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본능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우리가 곤경에 처한 이를 보았을 때, 무조건 도와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돕고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감사의 인사를 받았을 때는 더욱 좋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서, 나도 함께 슬퍼지는 것은 공감이다.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공감적 행동이다. 

하지만 그런 공감적 행동을 꼭 해야할 도덕적 의무는 없다.

하지만 슬픈 사람을 위로해주고, 그의 마음이 다소 편해지면, 내 마음 속에 담담한 좋은 울림이 있다. 


친구가 화가 났을 때, 왜 화가 났는지 묻고 위로하는 것은 공감적 행동이다. 

하지만 꼭 그래야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화가 난 친구가, 왜 화가 났는지를 이해하고, 오해를 풀거나, 안심시켜주게 되면 나 역시 만족스럽다.


그것은 ‘이타성’이라는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적 정서 반응이다.      

‘이타성’은 ‘공감과 마음 이론’ 기능과 관련이 없다. 누군가가 나를 돕고자 할때, ‘공감’이 풍부하면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감’은 절대로 ‘자비’의 전제 조건이 아니다. 

      

인간은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해도, 얼마든지 타인을 도울 수 있다. 

왜냐면 누군가 다쳤거나, 아파하거나, 먹을게 없거나, 심정적으로 괴로워하며 울고 소리지른다면, 

이 사람의 곤경은, (‘공감과 마음이론’ 없이도) 충분히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대의 감정을 공감해도, 얼마든지 착취할 수 있다. 

가족의 불안에 공감해서, 회사에서 횡령을 저지르고, 

여자 친구의 욕심에 공감해서, 뇌물을 받을 수도 있고, 

동료의 분노에 공감해서, 동료를 기분 나쁘게 한 행인을 폭행할 수도 있다. 


'공감' 을 평가하는 심리학적 설문지에는, 

기뻐하는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나도 기뻐지는지, 

무서워하는 타인과 함꼐 있을 때 나도 불안해지는지,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화가 난 사람을 달래는지, 

공포 영화를 보면 무섭고, 개그 영화를 보면 웃긴지, 등과 같은 항목이 주로 담긴다. 

그리고 이런 항목들의 설문지에서 최고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절대 그 사람의 인격이 성숙하거나 도덕적 소양을 갖췄다는 것이 아니다. 

위의 항목에서와 같은 성향이 심한 사람을, 심리학적으로는 피암시성이 높다거나, 히스테리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사이비종교의 광신도가 되거나, 악의적 선동의 피해자가 되기 쉬우며, 보이스피싱이나 다단계 등에 속수무책일 수도 있다. 

그리고 중독 환자나 범죄자의 진실하지 않은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여, 오히려 상황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작은 아들이 울면서 주식 빚이나, 투자 빚을 갚아야한다고 하니, 똑같이 울면서 딸에게 연락하여 보내달라고 수도 있고,  가족들 음식 맛있게 먹이고 싶다고 10번 넘게 종업원에게 앞접시 새로 가져다 달라고 수도 있다.    

      



‘공감과 마음이론’이 부족할수록, ‘자비’를 자신의 전두엽과 작업기억에 상주시켜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 ‘증오’가 자라나기 때문이다.  


타인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사람은 불안해지며, 상대의 의중이나 환경을 가장 나쁘게 추정하게 되고, 

결국 군중심리에 기반한 관습이나 고지식한 원리 원칙을 사용하게 된다. 

공감이 결여된, 관습과 원리원칙의 적용은, 조직의 위계와 경색을 유발시키며,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싸움을 유발시킨다. 조직 내부에서 위아래로, 동료들끼리 옆으로, 남녀로 싸우고 있는데, 모두 한쪽에서 보면 나름 그 전제들이 타당해 보인다.     

    

모든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요약하자면, 

인간은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그 지배체계를 견고히 하기 위해, 위아래로, 그리고 서로를 감시하고 억압한다. 그 과정에서, 도덕적 가치와 관습적 가치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이를 서로에게 강요한다. 그 중에는 ‘노동의 의무’ 라던가 ‘사회성’ 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갖지 못한 자들을 부적절하게 매도하고 비난한다. 

     

그러한 집단 히스테리의 부적절한 투사물들인, ‘정신병’이라던가, ‘자폐’ 라는 낙인에서 벗어나면, 

그리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벗어나면, 그 후 바로 우리의 마음에 목도되는 것은 부당한 억압과 비난을 일삼는 타인에 대한 증오다.      


당연하다. 억울하게 나를 따돌리거나 무능하게 취급했던 인간들을 떠올리며,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나도 인간이니까.  하지만 증오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단지 파괴할 뿐이다. 물론, 이러한 증오를 사회적으로 사용하여, 시민운동이나 진보 정치에 뛰어들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나의 사유를 따라오거나, 똑같이 쫓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많은 외톨이들이 자신의 마음 속에 무조건적인 모든 타인들에 대한 증오를 탑재하고 있다. 

이러한 이들은, 작업기억과 메모리 RAM 에, ‘증오’만이 24시간 작동하고 있다. 

‘공감과 마음이론’ 기능은 커녕, 하루하루의 생활에 재미를 느끼지도 못하며, 오로지 ‘지금 내가 이렇게 괴로운 것은, 그 때 나를 따돌렸던 걔네들 때문’ 아니면 ‘그때 나를 공감해주지 않은 엄마 때문’, '그 첫 직장, 그 진상 상사, 그 빌런 팀장 때문' 이라는 문장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면 어쩌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려 해도, ‘나는 가해자들이나 엄마에게 피해를 당한 피해자’이며, ‘당신은 과거 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도와줄 수도 없는 방조자’라는 경계심이 작동하기 때문에 대화가 어렵다. 그렇게 사회적 고립은 고착화되고 증오심은 더 늘어난다.      


21세기 한국 사회에는, 중등 과정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우울증에 걸려서 학업을 중단하고 고립된 청년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10여년을 혼자 지내면서 가해 학생들을 원망하고 엄마의 눈치를 보는 것이 정신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 이런 경우 ‘후천성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비유해도 될 정도로, ‘공감과 마음이론’이 부족해지고, 편집적이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나쁘게 보고, 자신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고 항상 공격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 증상의 선을 넘어가면 적극적인 약물치료가 필요한데, ‘모든 원인은 그들에게 있는데 왜 내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분노 때문에, 치료 개입이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미지의 것은, 나쁘게 추정하는 본능적 경향이 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공포를 느끼고, 속이 보이지 않는 검은 상자로 손을 넣기 무섭다. 전혀 모르는 타인을 보면 긴장되고, 그의 마음이 추정되지 않으면 일단 그가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인간의 원시적인 본능적 방어기제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대인관계에서의 불안이 심해지고, 상대방의 의도를 모르겠으면, 일단 인간은 '타인이 자신을 욕하거나 나쁘게 보고 있다', 혹은 더 심해지면 '나를 공격할 것이다'라고 추정하게 된다. 아스피들도 우울증이나 불안증에 걸리면, 이런 피해망상이나 강박을 보이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정신과에 와서 치료를 받고 나아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점차 모든 인간을, 혹은 가족이나 국가를 증오하게 되니, 이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큰 손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마음 상태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비’다. 

‘선행’하거나 '인내'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인 격려나 훈계도 아니다. 단지 내 마음 안에 이미 유전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곤경에 처한 사람이나 동물을 도왔을 때 느끼는 만족감에 대해 인식하면 좋다는 말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모두가 외롭고 공허한 존재이며, 

그러한 감정을 일시적으로 망각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방법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타인이다. 

사람들은 돈 보다, 타인, 타인의 인정, 인기와 명예를 갈구한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결국은 그 돈을 풀어 사람들을 조종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 받으려고 애쓴다. 

건물을 여러개 가진 장년을 맞이한 부자가, 선거철이 되면 하루 종일 거리에 서서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악수를 청하는 것도 외롭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인기에 치명상을 입은 유명인이나 정치인이 하루 아침에 자살해버리기도 한다. 


대인관계가 어려운 아스피는, 그런 치명적인 외로움과 공허함에 훨씬 취약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때 도움이 되는 것, 해결의 실마리가 바로 무조건적인 ‘자비’라는 관념의 존재다. 

     

‘자비’는, 

사람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꼭 특별한 사람이 있어야 하거나, 그 사람에게 사랑받아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그러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이 없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 특별한 사람에게 사랑 받지 않거나 미움 받아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이 많아도 사람은 외롭다. 특별한 사람이 자신에게 잘 해주고 사랑한다고 해도 사람은 외롭다. 사실 외로움과 타인의 존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뉴로티피컬이 군중 속에서 느끼는 고독과 불화는, 아스피들이 느끼는 외로움이나 혼란에 비해 절대 약하지 않다.  


모든 타인은 평등하다. 내게 더 귀한 사람, 나를 덜 외롭게 해주는 필연적인 존재란 없다. 내게 그런 존재가 지금 있다면, 결국 그 존재가 나를 떠나거나,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때 더 큰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가령, 종교인들, 스님이나 신부님, 수녀님들을 보면, 그분들의 인간관계에 특별한 ‘절친’이나 ‘베프’는 없다. 모든 타인을 ‘형제자매’라고 생각하고, ‘보살’이라고 칭하며 똑같이 사랑한다. ‘절친’이나 ‘특별한 애정관계’가 없으니, 특별히 한 지역이나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다. ‘신’ 외에 자기가 있고, 자기를 포함하여 모든 타인은 똑같이 평등하니, 애정적으로도 평등하다. 내가 덜 사랑하는 사람, 더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나를 더 사랑해주는 사람, 덜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다. 가끔 내가 외로우면, 당장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 뿐이고, 그 사람이 곤경에 처해있거나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줄 뿐이다.  

    

그렇기에 어찌보면 이 분들이 오히려 세심한 공감적 배려가 부족해 보이기도 하다. 자신의 표정이나 이야기를 듣고 무조건 따뜻한 위로나 원조를 바랬던 이들은, 실망하거나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분들은,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하면 그렇게 해주고, ‘무엇을 주세요’라고 할 때, 있으면 준다. 이런 행동은 '공감'이나 '마음 이론'의 기능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자선(慈善)’ 혹은 ‘자비(慈悲)’다.    

  

아스피를 대하는 심리 전문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유념해야할 부분이다. 가령, 자신의 상담으로 내담자가 위로 받았고 감사한다는 사실은, 내게도 감동이고 보람이다. 하지만, 만약 내담자가 나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없다면? 내담자가 마치 AI 에게 문의하듯이 내게서 정보를 얻어가거나, 대나무숲에서 외치듯 내 앞에서 성토하고 떠날 뿐이라면? 진단서나 소견서만 받으러 왔다면? 부모의 사랑은 천륜이고, 내리사랑이기에, 학교에서 어버이날 편지 쓸 때 외에는, 의식주 해결해주셔서 부모에게 감사하다고 느끼고 사는 어린이들은 없다. 내담자 역시 그렇게 느끼고 행동한다면? 그럴 때, 상호 공감과 보람에 의지하던 전문가는 배신감을 느끼고, ‘그래. 그러니까 결국 이것도 돈 받고 하는 일일 뿐이네’라는 노숙한 매너리즘으로 추락한다.

     


     

잘 자란 아스피 친구들은 순수하고 꾸밈이 없다. 자신의 얘기를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다. 보통의 노이로제 환자들은 흔히 자기 이야기를 각색하거나, 중요한 주제에 대해 회피하거나 침묵하지만, 아스피들은 그렇지 않다. 소위 전문가를 만났으니, 궁금한 것은 모두 물어봐야지 라는 열성이 있다. 내가 설명을 해주면 모두 잘 듣다가, 납득이 되면 알았다고 하고, 안 되면 다시 질문한다. 

     

‘우울증인 것 같다’, ‘다 재미없다, 관두고 싶다, 때려치고 싶다’라고 하지만, 그 기분은 ‘슬픔’ 보다는 ‘심심함’이나 ‘공허감’에 가까우며, 면담을 진행하다보면 곧 어떤 소재에 대한 강박적 불안, 집착이 드러난다. 진로, 건강, 자신의 수명, 재산, 자격증 합격 여부 등을 강박적으로 걱정하는 것이 주요 증상이다. 약물 치료로 이런 강박적 불안이 동반된 삽화가 해소되면, 아스피는 무척 만족해하면서 칼 같이 내원을 중단한다.      


그러다 한두계절이 지나고 증상이 재발하면 다시 내원하는데, 아무 말 없이 잠수했다가 다시 방문하는 것에 대해 (약간 뻘쭘해하면서 그동안 바빴다거나, 시간이 없어서 못왔다는 식의 뉴로티피컬에 비해) 전혀 거리낌이 없다. 그러다 또 떠나고, 다시 오고. 그러다보면 어느날, 치료자 입장에서 좀더 도와주고 싶은 순간이 온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사실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또 아스피가 쿨해서 좋은 것이, 보통의 신경증적 환자들 같으면 수치심을 느끼거나 모욕을 당했다고 느낄 수도 있을텐데, 아스피들은 ‘아, 어렸을 때부터 그런 말 많이 들었다’며 호기심을 보인다. 그러면 우리 뇌에는 여러 종류의 인지기능이 있는데, 암기와 판단, 계산 같은 것 외에, 다른 사람의 기분을 내 마음으로 복사해오는 공감이란 것이 있다고 설명해준다. 그리고 이 공감의 낮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싸움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해준다. 

     

그 후부터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이나 최근 만났던 사람들 사이에서 있었던 궁금증이나 혼란스러움에 대해 질문하고 설명해주는 사회기술훈련을 진행하는데, 집중해서 열심히 듣는 모습을 보면 무척 보람된다. 

     

사족을 붙이면, 보통의 노이로제 환자들은 라포가 형성되어 면담이 지속되면, 치료자에 대한 전이 감정이 형성되어, 오히려 더 치료자를 어려워하고, 상담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아스피 친구들은, 필요할 때면 불쑥 나타나서 명쾌하게 질문하고 충분히 설명을 들으면 잠항한다.  

      

가끔은 내 안에 어떤 허무감도 있다. 내가 열심히 설명하면, 저 쪽에서 열심히 듣고, 그러니 나는 뿌듯하고, 저쪽에서 고마워 하고, 이렇게 서로에게 특별한 인간적 가치가 부여되면서 사람 사이의 정(情)이 쌓여가는 것 같지만...그게 아니려나. 나를 단지 신뢰도가 높고 안정적인 전문직 서비스 제공자로 여기고 있을 뿐.

      

그러니, ‘자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괜찮다. 너에게 필요한 팁을 줄테니 만족스러우면 갖고 가라. 두세달 지나서 어느날 답답하거나 궁금한 문제가 생기면 불쑥 나타나서 또 질문하겠지. 그러면 그때도 잘 알려주겠다. 그러면 또 ‘아 그렇구나’ 하고 훌쩍 떠나가라. 괜찮다. 나는 이 자리에 계속 있을 것이며, 너에게 그것으로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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